이스라엘 우경화하나... 홀로코스트 박물관장에 극우 정치인 지명

입력
2020.11.30 19:00

이스라엘이 우경화하는 분위기다. 정부가 민족주의 성향 극우 정치인의 홀로코스트(나치 독일의 유대인 대학살) 국립기념관장 임명을 강행하려 하면서다. 극단적 유대주의가 부활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온다.

미 일간 뉴욕타임스(NYT)는 28일(현지시간) "수년간 극우주의의 대명사로 불렸던 에피 에이탐 전 이스라엘 주택장관이 예루살렘의 가장 신성한 기관인 야드바셈(Yad Vashem)의 관장이 될 듯하다"며 이스라엘 정부를 작심 비판했다. 군 장성 출신에 민족종교당 당수를 지낸 에이탐 전 장관은 서안 지구 팔레스타인인을 대상으로 한 가혹 행위와 대량 추방을 주도하고 이스라엘 아랍인에 대한 법적 차별을 요구한 극우 정치인이다. 이번 내정은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의 전폭적 지원 아래 보수 성향 집권 여당 리쿠드당의 지브 엘킨 고등교육장관이 단행했다. 에이탐 전 장관은 현재 유일 후보로, 정부가 11월 중순 그의 입후보를 심사하고 승인 완료해 현재 내각 투표만 남아 있다.

국내외 시선은 곱지 않다. 미국 최대 유대인 단체인 반(反)명예훼손연맹(ADL)이 즉각 반대 성명을 냈고, 역사학자를 비롯한 750명의 연구자들 역시 야드바셈 이사회와 이스라엘 의회에 항의 청원을 제출했다. 청원에 참여한 학자 중 하나인 데보라 립슈타트 미 홀로코스트 연구자는 NYT에 "이것은 실수 이상의 비극"이라며 "야드바셈의 명성과 기록 자체에 대한 얼룩이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현지 매체인 타임스오브이스라엘역시 "홀로코스트 연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유대인은 물론 다른 민족·인종의 사람들과 대화할 수 있는 능력"이라며 "편협함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인물을 관장으로 임명하는 것은 이미 어려운 투쟁을 더 어렵게 한다"고 단언했다.

야드바셈의 의미는 단순한 기념관 이상이다. NYT는 "야드바셈은 정파를 가리지 않고 세계 지도자가 이스라엘 순방 때 필수적으로 찾는 신성한 기관"이라고 강조했다. 키리아코스 미초타키스 그리스 총리, 프랑스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 등이 이 기관을 방문했다. 600만 유대인 학살 기록과 더불어 보편 인권 보호와 인종주의 철폐를 위한 교육 역시 이 기관의 본령인 셈이다.

에이탐 전 장관의 지명은 극우 민족주의와 포퓰리즘이 부상 중인 세계적 추세와 무관하지 않다는 게 전문가들 분석이다. 지금껏 대부분 관장이 비(非)정치인인 학자와 연구자들이었던 건 홀로코스트라는 역사적 비극을 정치 논리와 연관 지어서는 안 된다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우파가 정권을 잡으며 정치적 목적 달성을 위해 기관을 악용하고 있다는 지적이 적지 않다.

실제 올 1월 야드바셈에서 열린 세계 홀로코스트 포럼에서는 여기 참가한 각국 지도자가 홀로코스트를 앞세워 자기 정파 논리를 주장하며 이념과 이해관계가 서로 다른 세력 간의 외교전이 벌어졌다. 마이크 펜스 당시 미 부통령은 연설을 통해 '홀로코스트 부정'을 빌미 삼아 이란을 강하게 비판하며 “세계는 이란에 강하게 맞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치적 주장을 편 것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도 마찬가지였다. 포럼 연설에서 폴란드를 겨냥해 “죽음의 수용소들은 나치뿐 아니라 여러 나라에서 운영됐다”고 주장해 논란을 불렀다.

장채원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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