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 핵 과학자의 피격 사망으로 중동 정세가 긴박해졌다. 출범을 50여일 앞둔 조 바이든 미국 차기 행정부의 중동 외교가 시작도 하기 전에 암초를 만난 모양새다. 이란은 바이든 대통령 당선인의 이란 핵합의(JCPOA·포괄적 공동 행동계획) 복원 공약에 줄곧 부정적 입장을 취해 온 이스라엘을 테러의 배후로 지목했다.
미 일간 뉴욕타임스(NYT)는 28일(현지시간) 전날 이란 국방부 핵 과학자 모센 파크리자데(59)가 수도 테헤란 인근 소도시 아브사르드에서 테러 공격을 받고 숨진 것과 관련해 “이란 핵합의를 되살리려는 바이든 당선인의 노력을 무력화시킬 수 있다”고 보도했다. CNN방송도 "중동 지역 긴장이 고조되면 가뜩이나 풀기 어려운 이란 핵 문제가 더욱 까다로워질 수 있다"고 전망했다.
미 정부는 버락 오바마 행정부 시절인 2015년 7월 이란이 핵사찰을 받는 대가로 대(對)이란 경제 제재를 푸는 핵합의를 성사시켰으나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2018년 5월 이를 일방적으로 탈퇴했다. 이스라엘은 JCPOA에 대해 체결 당시부터 반대해 왔다. 이슬람 시아파 맹주 이란의 미사일 및 핵개발을 큰 안보 위협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영국 BBC방송은 "이스라엘은 바이든 당선인의 취임 후 중동 정세의 변화를 우려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이란 핵 개발 저지와 더불어 무엇보다 바이든 당선인이 이란과의 외교를 재개하는 것을 막으려는 게 목적이란 분석이 나오는 이유다.
이란은 즉시 이스라엘과 미국을 배후로 지목하고 보복을 경고했다. 영국 가디언은 "이번 암살에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가 관여돼 있다면 임기를 단 몇주 남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적극적인 지원까지는 아니어도 이번 사건을 눈감아 줬다는 의미"라고 부연했다. 이스라엘로서는 이란이 무력 대응에 나선다면 이란과 트럼프 행정부 간 군사적 대치 상황을 유도할 수 있게 되는 구조다.
이 경우 바이든 당선인은 미국의 JCPOA 탈퇴 상황보다 더 불안정한 중동 관계를 새 정권의 과제로 맞닥뜨리게 된다. 공약대로 이란 핵 합의에 복귀할 수 있을지도 몇주간 이란의 대응에 달렸다는 평가다.
이와 관련, 전문가들은 이번 사건을 지난 1월 미국의 가셈 솔레이마니 전 이란 이슬람혁명수비대(IRGC) 정예군(쿠드스군) 사령관 암살에 비교하며 "확실한 외교 방해 목적의 사건"이라고 강조했다.
영국 싱크탱크인 유럽외교협회(ECFR)의 엘리 게란마에 선임연구원은 "솔레이마니의 죽음으로 IRGC가 달라지지 않았듯 파크리자데의 사망으로 이란 핵 개발 행보가 근본적으로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며 "이번 암살의 목적은 핵 개발 방해가 아닌 외교 훼방"이라고 잘라 말했다.
관건은 이란의 향후 대응이다. 강경파들은 즉각적인 보복을 요구하고 나선 반면 한편에선 바이든 행정부와 새로운 관계 정립을 위해 군사행동을 자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지난 1월 가셈 솔레이마니 전 혁명수비대 사령관이 미국의 드론 폭격으로 사망했을 때 이란은 즉각 이라크 내 미군기지를 미사일로 공격했었다.
이와 관련 하산 로하니 대통령은 TV 연설에서 "모든 적들은 위대한 이란 국민이 이 범죄 행위에 대응하지 않는 것이 더 용감하고 명예롭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말해 주목된다. 지난 4년간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주도한 강도 높은 경제제재를 의식하고 있다는 평가도 나왔다.
미 연구단체 센추리재단의 디나 에스판디어리 연구원은 "파크리자데의 죽음으로 당장 뚜렷한 변화가 생기지 않더라도 같은 사건이 반복되면 적절한 보복 조치를 해야 한다는 이란 내 목소리가 강경파뿐 아니라 다양한 계층에서 확산될 것"이라며 "이란인들이 자제력을 갖고 행동하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고 내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