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한 말이겠나. 엄청 고민하고 한 말이다."
지난 10일 추미애 법무부 장관과 윤석열 검찰총장을 향한 정세균 국무총리의 '질책'을 두고 16일 한 측근 인사가 덧붙인 말이다. 당시 기자간담회에서 정 총리는 '추 장관과 윤 총장이 갈등하는 상황에서 어떤 역할을 하겠나'란 질문을 받고 "윤 총장은 자숙하라" "추 장관은 점잖아져라"고 각각 경고했다. "고민 끝에 한 말"이라는 뜻은 비록 형식은 '질문에 대한 답변'이었을지언정 충분히 생각하고 참모진과도 협의를 거쳐 내놓은 '작심 발언'이라는 것이다.
사실 '추ㆍ윤 갈등' 속에서 정 총리의 '역할론'을 띄운 것이 정 총리 본인이었다. 이달 4일 국회에 출석한 정 총리는 관련 질문을 회피하지 않고 "앞으로도 불필요한 논란이 계속된다면 총리로서의 역할을 마다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간담회에서 나온 경고는 스스로 언급한 역할론의 연장선인 셈이다.
정 총리가 추ㆍ윤 갈등의 해결사를 자처한 것은 일차적으로는 내각을 통할하고 있다는 책임감 때문이다. 한 여권 관계자는 "정 총리는 '수 개월째 이어지는 두 인사에 대한 국민적 피로감이 커질 대로 커진 만큼, 누군가 나서기는 해야 하고, 그렇다면 국정 책임자인 자신이 나서는 게 맞는다'고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는 일견 원론적인 언급으로 비치지만, 현실적인 정치 역학에서 보면 그야말로 '작심'이 필요한 대목이다. 총리의 지나친 개입이 자칫 대통령 인사권과 충돌할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하필 '정세균 대망론'이 모락모락 나오는 시점에 국민적 관심이 쏠린 사안의 한복판에 뛰어들었다는 점도 예사롭지 않다.
이 때문에 정치권에선 정 총리가 대중적 인지도를 높이고 대권주자로서의 존재감을 키우기 위해 정치적 모험을 시도한 것이 아니냐는 시각도 상당하다. 정 총리로서는 두 인사의 싸움이 잦아들 경우 국정 조정자로서의 면모가 부각될 수 있다. "자숙하라"는 경고로 윤 총장의 기세를 꺽어놓으면 윤 총장을 눈엣가시로 여기는 친문(親文)의 마음도 사로잡을 수 있다. 정 총리 주변에서는 "임면권이 없는 총리가 공개적으로 말한 것 자체가 큰 함의를 지닌다. 청와대도 적절히 반응하지 않겠나"는 말도 나왔다.
하지만 정 총리 발언 후 일주일이 지났지만 추·윤의 갈등이 지속되는데다 정 총리 발언에 힘을 실어줄만한 청와대의 후속 움직임도 딱히 없다. 한 여권 관계자는 "잡음이 많긴 해도 추 장관이 윤 총장을 상대할 적임자라는 생각이 청와대에 강하다"며 "또 법조인 출신 문 대통령이 윤 총장을 법적 근거 없이 내칠 분위기도 아니다"고 말했다.
이날 일부 언론에선 '정 총리가 최근 김외숙 청와대 인사수석과 만나 추ㆍ윤 관련 논의를 한 듯하다'는 취지의 보도도 나왔으나 청와대는 고개를 젓는 기류다. 이는 추ㆍ윤 갈등을 해결하겠다고 나선 정 총리를 문 대통령이 확실하게 밀어주고 있지는 않다고 해석할 만한 정황들이다.
그래서일까. 정 총리 주변에서도 미묘한 변화가 감지되고 있다. "이미 추 장관과 윤 총장과 관련해 여러 번 말을 했기 때문에 또 다른 말을 보탤 것 같지는 않다" "(대통령에게) 의견 표명을 할 수야 있겠지만 당장은 아닌 것 같다"는 말들이 나온다. 지난주 정 총리가 "안타깝다"며 '자숙' '절제' 등의 단어로 톤을 높였던 데서 관망세로 돌아선 것이다. 이는 '정세균 역할론'에 대한 청와대와 정 총리의 생각이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는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