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역대 최대 규모로 편성한 내년도 예산안(555조8,000억원)이 국회 상임위 심사 과정에서 11조원 이상 불어나고 있다. 당초 더불어민주당은 ‘초슈퍼예산’에 대해 “코로나19라는 전대미문의 국난 극복을 위한 필수 재원”이라며 ‘원안 사수’를 고수했다. 야당인 국민의힘도 ‘최소 15조원 삭감’을 주장했다. 하지만 정작 예산 심사가 시작되자, 내년 4월 보궐선거를 앞둔 여야가 지역ㆍ민원 예산 사업을 늘리라는 요구에 슬그머니 '묻지마 증액'으로 입장을 선회한 것이다.
15일 국회 상임위원회 17곳 중 11곳이 정부 예산안에 대한 예비 심사를 마친 결과, 정부 원안보다 예산 총액이 오히려 11조4,000억원 늘었다. 이번 주 중 예비심사를 마칠 나머지 상임위까지 고려하면 17개 전체 상임위의 증액 규모는 12~13조원에 육박할 것으로 관측된다.
매년 선심성 증액 논란의 중심에 있는 국회 국토교통위원회는 이번에도 도로와 철도 등 사회간접자본(SOC) 사업을 중심으로 정부안보다 2조4,000억원 늘렸다. 한국일보가 이날 국토위 예비심사 보고서를 분석한 결과, 전국 111개 고속도로ㆍ국도ㆍ국지도 등의 건설ㆍ정비 사업 예산이 정부안보다 1조2,300억원 늘어났다. △안성~구리 고속도로(1,621억원) △함양~울산 고속도로(1,000억원) △세종~안성 고속도로(837억원) 등이 대표적 증액 사례다.
‘묻지마 증액’도 상당수였다. 먼저 경남 창원 국가산업단지ㆍ울산 미포국가산업단지 등 5개 산단에 진입하는 도로를 확장하는 예산이 총 45억원 신규 반영됐다. 국토부는 ‘실시계획이 수립되지 않아 예산을 지원할 근거가 없다’며 반대 의견을 밝혔지만, 결국 여야 뜻대로 관철됐다.
호남고속도로 동광주~광산 IC 구간 도로를 확장하는 사업 또한 국토부가 “증액을 해도 쓰기 어렵다”고 거부 의사를 밝혔지만 정부안보다 143억원이 늘었다. 광주 북구갑을 지역구로 둔 조오섭 민주당 의원이 증액을 ‘읍소’하면서다.
충청내륙2ㆍ3국도 사업이 각 33억, 483억원 불어나는 과정도 마찬가지였다. 국토위 예산결산심사소위 위원장인 박성민 국민의힘 의원이 “국토위 입장을 좀 세워 달라”고 읍소했고, 국토부도 결국 증액에 동의했다. 이에 대해 한 국회 관계자는 “국토위 예결소위에서 국토부는 ‘돈을 더 줘도 못 쓴다’고 난색을 표하고, 여야 의원들은 ‘그래도 증액해 달라’고 얘기하는 진풍경이 반복됐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국토위와 함께 ‘알짜’ 상임위로 분류되는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원회(2조3,000억원)와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2조2,000억원) 또한 지역 예산을 크게 늘렸다. 농해수위는 어촌ㆍ어항을 현대화하는 ‘어촌뉴딜 300 사업’ 예산을 280억원 증액했다.
당초 정부는 올해 본예산(4,344억원)보다 875억원을 증액해 신규 사업지 60곳을 선정할 계획이었는데, 국회 심사 과정에서 20곳이 추가됐다. 하지만 국회 예산정책처에 따르면 9월 말 기준 2019~2020년 사업 대상으로 선정된 지자체 90곳 중 실집행률 0%가 8곳, 50% 미만은 19곳에 달했다.
산자위도 산업단지 관련 예산을 1,010억원이나 증액했다. 산자위 소속으로 심사에 참여했던 조정훈(비례대표) 시대전환 의원은 “예산소위에서 심사한 예산안을 양당(더불어민주당, 국민의힘) 간사 간 합의로 뒤집었다”며 “예산안에 동의할 수 없다”고 공개적으로 문제제기를 했다.
상임위가 결정한 예산이 내년도 본예산으로 확정되는 것은 아니다. 최종 칼자루는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예산안등조정소위원회(예결소위)가 쥐고 있다. 예산안 법정처리시한인 다음 달 2일까지 보름 넘게 이를 조정할 시간이 남아 있다. 예결소위는 오는 16일부터 각 상임위에서 넘어오는 예산안에 대해 감액 심사를 진행한다. 이 과정에서 각 상임위가 ‘뻥튀기’한 예산 상당수에 대해 삭감이 이뤄질 것으로 전망된다.
예결위 소속 한 의원은 “각 상임위가 향후 예결위 심사에서 예산이 대폭 삭감될 것을 감안해 ‘일단 증액하고 보자’는 식으로 예산을 짜서 예결위로 보내는 관행이 매년 반복되고 있다”며 “상임위 논의는 존중하지만, 사업별 시급성, 우선순위 등을 고려해 대폭 조정이 불가피할 것”이라고 했다.
실제 지난 6월 3차 추가경정예산안 처리 당시, 상임위 예비심사에서 2조9,520억원 증액됐지만, 결국 예결위를 거치며 정부안보다 2,000억원이 감소한 예산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올해 본예산 심사를 했던 지난해에도 상임위를 거치며 10조원 가량 늘었지만, 실제 본회의를 통과한 예산안은 정부안보다 1조2,000억원 줄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