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대 규모 자유무역협정(FTA)인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이 15일 타결됐다. 2012년 한국과 아세안(ASEANㆍ동남아시아국가연합), 중국, 일본, 호주, 뉴질랜드가 협상 개시를 선언한지 8년 만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RCEP 정상회의에서 "RCEP이 지역을 넘어 전 세계 다자주의 회복과 자유무역질서의 발전에 기여할 것으로 확신한다"고 강조했다.
나흘 간 진행된 문 대통령의 아세안 외교는 RCEP 서명식을 끝으로 막을 내렸다. 문 대통령이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일본 총리에게 공개적으로 유화적 제스처를 취하며 한일 관계 개선 의지를 드러낸 것 등이 주요 장면으로 꼽힌다.
청와대는 15일 열린 RCEP 정상회의에서 인도를 제외한 15개국 정상이 공동선언문을 채택했다고 밝혔다. RCEP 참가국의 무역 규모, 인구, 국내총생산(GDP·명목 기준)이 전 세계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30%에 달한다. 공동선언문은 "역내 선진·개발도상·최빈개발도상 경제의 다양한 조합으로 구성된 전례 없는 메가 무역협정"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RCEP 타결로 가맹국 간 관세가 낮아질 전망이다. 예컨대 인도네시아로 자동차 부품을 수출하는 업체는 현재 최고 40%까지 관세를 내야 하지만, RCEP 발효 이후엔 0%로 줄 수도 있다는 게 정부의 설명이다. 보다 체계적인 무역ㆍ투자 시스템이 구축되는 한편, 기업 지적재산권 보호도 수월해질 것으로 보인다.
문 대통령은 구체적으로 "상품과 서비스 시장을 함께 열어 투자 자유화에 속도가 날 것이고, 원산지 기준을 통일해 공급망이 살아날 것이다. 이를 통해 (코로나19 위기에서) 가장 빠르게 경제를 회복하는 지역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고 강민석 청와대 대변인은 전했다. 문 대통령은 또 "역사적 순간이다. 자유무역이라는 가치 수호를 행동으로 옮겼다"고도 평가했다.
정상들은 RCEP 조기 발효를 위해 국회 비준 등 국내 절차를 각자 빠르게 추진하기로 했다. 협상에는 참여했지만 끝내 가입하지 않은 인도에 대해서는 "RCEP은 인도에 지속적으로 개방돼 있음을 거듭 강조한다"고 선언문을 통해 확인했다. 문 대통령도 "오랜 시간 함께 논의했던 인도의 조속한 가입을 희망한다"고 강조했다.
RCEP 타결을 위해 8년 동안 총 31차례 공식 협상과 4차례 정상회의, 19차례 장관 회의 등이 열렸다. 총 54회에 달한다. 올해는 코로나19 상황에도 불구하고 10여 차례 이상 화상 회의를 열었다. RCEP은 한국이 화상으로 체결한 최초의 무역협정이기도 하다. 청와대 핵심관계자는 "코로나19로 모든 것이 단절된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에서 (RCEP 서명식이 열린 것은) 하나의 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일각에서는 존 바이든 행정부 출범 후 미국이 주도하는 포괄적ㆍ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에 복귀할 경우, 한국이 '난감한 처지'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우려한다. 중국이 참여한 RCEP에 서명한 한국에게 CPTPP에서의 역할을 요구할 수 있다는 점에서다. CPTPP와 RCEP은 아시아태평양 경제 블록 주도권을 쥐려는 미국과 중국의 '상징적 협력체'라는 점에서 한국은 양자 택일을 강요당할 위험이 있다. 아시아ㆍ태평양 11개국이 참여한 경제협력체인 TPP는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이 2009년 참가 의사를 표명했으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2017년 탈퇴를 선언했다.
다만 청와대 핵심관계자는 "CPTPP와 RCEP은 대결ㆍ대립 관계가 아니고 상호보완적인 관계"라며 "(우리는) 미중 대결의 관점이 아니라, 다자주의에 입각한 역내 자유무역질서 확대를 지지하는 차원에서 아세안 중심의 RCEP에 참여한 것"이라고 말했다. 미중 갈등의 중심에 한국이 설 가능성이 있다는 시각을 정면 반박한 것이다. 아울러 "베트남, 싱가포르 등 아세안 4개국과 일본, 호주, 뉴질랜드 등은 RCEP에도 참여하고 CPTPP에도 참여한다"고 부연했다.
문 대통령의 아세안 관련 외교는 12~15일에 걸쳐 진행됐다. 모두 화상회의 방식이었다. 14일 열린 아세안+3 정상회의에서 문 대통령은 스가 총리를 콕 집어 "특히 반갑다"고 했다. 이어 같은날 동아시아정상회의(EAS)에서 "2021년 일본 도쿄, 2022년 중국 베이징으로 이어지는 동북아 릴레이 올림픽을 '방역ㆍ안전 올림픽'으로 치러내기 위해 긴밀히 협력할 것을 제안한다"고 말했다. 청와대 관계자는 "(일본과 관계 개선을 위해) 여러 측면에서 성의를 표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12일 한ㆍ아세안 정상회의에서는 아세안과의 협력 관계를 고도화하겠다는 내용을 담은 '신남방정책 플러스'를 발표했다. 다음날 한ㆍ메콩 정상회의에서는 한국과 메콩 국가 간 '사람ㆍ번영ㆍ평화의 동반자 관계'가 '전략적 동반자 관계'로 격상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