샌프란시스코 교외의 울창한 숲 사이로 우뚝 솟은 소녀상. 세계 최고의 양자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자랑하는 IT 회사 아마야의 상징물이다. 회사를 창업한 포레스트의 죽은 딸을 기리는 거대한 조각상. 사고로 아내와 어린 딸을 잃은 포레스트는 딸의 이름 ‘아마야’를 그대로 회사의 이름으로 가져왔고, 그를 기리는 조각상을 회사 부지에 세웠다. 지극한 부정이다.
드라마가 시작되면 숲 위로 보이는 아마야의 아름다운 조각상. 나는 그 모습을 보며 불길했다. 유적의 웅장한 석상이나 건축물을 보며 감탄하지만 한편 위압적인 상징물을 통해 인간의 한계를 초월하려는 허튼 욕망을 떠올리기도 한다. 아마야의 기호와 이미지는 회사 이름과 출근 버스, 광고 등 사방에 붙어 있다. 초반의 몇 장면만 보아도 알 수 있다. 포레스트는 IT 긱(Geek)이면서, 집착과 강박에서 절대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그러니까 결국 심각한 문제를 일으키고 말 것이라고.
아마야에 근무하는 릴리의 남자친구 세르게이는 포레스트에게 프레젠테이션 할 기회를 얻는다. 포레스트의 눈에 든 세르게이는 아마야의 핵심 부서인 ‘데브스’에서 근무할 기회를 얻는다. 숲속 외진 공간에 독립적인 사무실이 존재하는 데브스에서 무엇을 연구하는지, 어떤 성과를 이루었는지 아무도 모른다. 오로지 포레스트와 데브스에 속한 인력만이 알고 있다.
마치 외계의 공간 같은 데브스에 들어간 세르게이에게 모니터의 코드를 보라는 지시만이 주어진다. 코드를 보고 있으면, 당신이 할 일이 무엇인지 알게 될 것이라며. 코드를 보던 세르게이는 갑자기 화장실에 가서 구역질을 하고 경악한다. 그리고 사라진다.
세르게이를 걱정하던 릴리는 이틀 만에 회사에서 연락을 받는다. 거대한 아마야의 조각상 앞에서 세르게이가 분신자살을 했다는 것이다. 감시 카메라에 모든 것이 찍혀 있다. 그러나 모든 것을 믿을 수 없었던 릴리는 세르게이의 핸드폰을 뒤져 본다. 수상한 앱을 발견한 릴리는 암호를 풀기 위해 전 남자친구 제이미를 찾아간다. 그리고 찾아낸 비밀은 엉뚱하게도, 그가 러시아의 산업스파이였다는 것이다. 세르게이와 접선을 했던 남자는 다시 릴리를 포섭하려 하고.... 그렇다면 '데브스'는 첩보 테크 스릴러 장르인 것일까?
그럴 리는 없다. '데브스'의 제작자이며, 감독이며, 작가이기도 한 알렉스 갈런드의 전작은 '엑스 마키나'(2015)와 '서던 리치:소멸의 땅'(2018)이다. 근래 나온 SF 영화 중에서 손꼽히는 두 편을 만든 감독이자 작가다.
'엑스 마키나'는 인간과 로봇, AI의 차이는 무엇인지 진지하게 질문한다. 인간은 ‘사고하는 기계’와 과연 다른 것일까. 흔히 영혼이라 하지만, 영혼은 과연 존재하는 것일까? '서던 리치:소멸의 땅'은 우주와 자연의 일부인 인간에 대해 질문한다. 거대한 우주에서 변화, 소멸, 재생하는 하나의 존재로서 인간은 어떤 가치 혹은 의미를 지니고 있을까. 알렉스 갈런드는 우리가 인간에 대해, 세계에 대해 아직 모르지만 치열하게 알고 싶은 것들을 정밀하고 섬세하게 그려 낸다.
릴리는 세르게이의 정체를 파악했지만, 왜 죽은 것인지 파헤치기 위해서는 데브스에 대해 알아야 한다. 데브스에 들어간 첫날 죽은 이유. 데브스는 무한대의 데이터를 이용하여 미래를 예측하고 과거의 정보를 구체화시키는 작업을 한다. 즉 미래를 알 수 있고 과거의 이미지와 영상을 볼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이다. 천재라 할 케이티, 린든, 스튜어트 등이 이런 프로그램을 만들어 냈다.
왜? 포레스트는 과거의 아마야를 다시 만나고 싶다. 되살리고 싶다. 그래서 과거를 볼 수 있고, 완벽하게 되살릴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는 것이다. 데브스에서는 아직 과학적으로 입증되지 않은 실험들을 진행한다. 방해가 되는 것은 무조건 제거해 버린다. 그런 점에서 포레스트 역시 ‘미친 과학자’(Mad Scientist) 부류에 속하는 인물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서 시간은 직선으로 흐른다. 과거에서 현재, 미래로 나아간다. 다차원에 속한 존재라면 시간은 편재하는 것이겠지만, 3차원의 인간에게는 어쩔 수 없다. 그렇기에 인간에게 미래를 예측하는 것은 중요할 수밖에 없다. 다가오는 미래를 미리 준비하고, 미리 대응할 수 있으니까. 그런데 묘하다. 미래를 알 수 있다는 것은, 모든 것이 이미 예정되어 있다는 말과 마찬가지다. 반대로 무작위로 바뀔 수 있는 미래라면 미리 본다는 것이 과연 의미가 있을까.
테드 창의 소설을 각색한 드니 빌뇌브 감독의 영화 '컨택트'의 질문도 그것이었다. 궁극적인 자유 의지는 과연 존재하는 것일까. 모든 미래가 결정되어 있고, 그것을 이미 알고 있다면 나는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언어학자 루이스는 외계인을 만나고, 그들의 언어를 이해하면서 미래를 보게 된다.
어쩌면 비극적인 미래다. 그것을 알면서도 루이스는 과연 같은 길을 걸어갈까? 어쩌면 미래를 보고 선택하는 것조차도 이미 결정되어 있는 것일 수도 있다. 혹은 사지선다 중에서 하나의 길만을 결국 택하는 것일지도. 매순간 내가 할 수 있는 선택은 하는가, 하지 않는가 밖에 없으니까.
케이티는 이유 없는 결과는 존재하지 않고, 무작위적인 사건이란 없다고 릴리에게 말한다. 모든 것은 선행한 사건에서 귀결한다는 것이다. 내가 지금 존재하는 현재는 이미 일어난 일의 결과로서만 존재한다. 그렇다면 미래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과거에 더해 내가 지금 행한 사건들로 미래는 이미 결정되어 있는 것이다. '데브스'는 아무리 벗어나려고 해도, 주체적인 선택을 하려 해도 결국은 동일한 선택을 할 수 밖에 없다고 말한다. 이미 과거를 통해 축적된 결과로서 현재가 존재하니까.
하지만 아니다. 우리는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안다. 소행성이 충돌한다거나 핵미사일이 발사된다거나 하는 거대한 일을 내가 선택하고 결정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나의 인생에서 소소한 부분들은 선택이 가능하다. 명백한 의지가 있다면, 나의 다음 미래는 바꿀 수 있다. 세계는 바꿀 수 없어도, 나의 세상은 변화시킬 수 있다.
그래서 다중우주론이 나온다. 처음 결정된 미래가 있고, 나의 선택 때문에 갈라진 다른 우주가 또 존재하는 것이다. 다만 포레스트는 믿지 않는다. 정확하게 말하면, 포레스트에게 다중 우주는 없어야만 한다. 그가 다시 만나고, 다시 창조하고 싶은 아마야는 유일한 존재여야 하니까. 그의 강박에도 불구하고 결국 우주는 다양하게 존재한다. 컴퓨터 프로그래밍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게임판이라고 해도 선택지는 하나 이상이다. 신이 주사위를 굴리면, 게임의 규칙 안에서 자유로운 행동 정도는 가능하지 않을까. 그렇게 믿는다.
'데브스'는 복잡하고 느리다. 알렉스 갈런드는 이야기를 스릴과 스펙터클로 전달하는 감독은 아니다. 자신이 던지고 싶은 질문을 느리지만 꼼꼼하게 아름답게, 시각과 청각으로 느끼게 한다. 그들이 처한 고민이 무엇인지 분위기를 통해 느끼게 한다. '데브스'에 나오는 온갖 이론과 가설, 명제들을 완벽하게 이해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나도 잘 모른다. 모르지만, 대략 어떤 의미라는 것을 파악하고 넘어가면 무리 없이 따라갈 수 있다. 8부작 드라마니까, 서서히 끈질기게 반복하며 생각할 지점을 짚어 준다. 무엇보다 아름다운 영상과 소리에 집중하며 편하게 보면 된다. 완벽한 이해가 아니라 경험이다.
'데브스'를 보고 나면, 다른 세계를 보고 온 기분이 든다. 엄청나다기보다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를 다른 질감과 색채와 음향으로 재구성한 다른 세계랄까. 그런 경험 후, 익숙한 이곳을 보면 가끔은 생각이 든다. 이 세계의 어딘가 분명 이상하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