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엔비디아에 이어 SK하이닉스ㆍAMD까지 최근 글로벌 반도체 시장에서 초대형 인수합병(M&A)이 잇따르고 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펜데믹(세계적 대유행)으로 시장 상황을 예측하기 어려워 지면서, 기업들이 인수합병을 통해 상대적으로 취약한 분야의 경쟁력을 보강하려는 움직임으로 풀이된다.
반도체 업계의 시선은 이제 삼성전자에 쏠리고 있다. 세계 반도체 시장의 합종연횡이 본격화 하고 있는 가운데 삼성전자만 이렇다 할 움직임이 없기 때문이다.
3일 반도체 업계에 따르면 올해 글로벌 반도체 시장의 초대형 M&A 포문은 미국 그래픽처리장치(GPU) 제조사 엔비디아가 열었다. 엔비디아는 지난 9월 세계 최대 반도체설계업체(팹리스) ARM을 400억달러(약 47조5,000억원)에 인수하기로 했다. 이는 글로벌 반도체업계 사상 최대 규모다. 글로벌 반도체 시장에서 지난해 단행된 전체 M&A 규모인 317억달러(약 37조원)도 크게 웃도는 수준이다.
뒤를 이어 SK하이닉스가 지난달 20일 90억달러(약 10조3,104억원)에 인텔의 낸드메모리 사업부를 인수키로 했다. D램에 비해 상대적으로 열세였던 낸드메모리 사업의 경쟁력을 끌어올리기 위해서다. 이번 인수는 국내 기업 중 가장 큰 M&A규모다.
엔비디아와 경쟁 관계인 미국 반도체설계업체 AMD는 최근 인공지능(AI)칩과 프로그래머블칩(FPGA) 제조업체 자일링스를 350억달러(39조5,000억원)에 인수하기로 했다. 또, 데이터 저장 장치와 네트워크 설비에 사용되는 반도체를 제조하는 회사인 마벌 테크놀로지 그룹도 동종 업체인 인파이를 약 100억달러(11조3,500억원)에 인수하기 위한 협상이 타결을 앞두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이처럼 글로벌 반도체 기업들의 연이은 ‘합종연횡’ 경쟁에도 삼성전자는 존재감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이재용 부회장 주도로 2016년 전장기업인 하만을 80억달러(약 9조원)에 인수한 것을 마지막으로 대규모 M&A를 추진하지 않고 있다.
메모리반도체만 놓고 보면 D램과 낸드플래시 모두 확고부동한 선도기업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는 삼성전자가 굳이 큰 돈을 쓰며 M&A 시장에 나설 필요가 없다. 하지만 이 부회장이 힘을 주고 있는 시스템반도체 쪽에서는 상황이 다르다. 특히 삼성전자가 미래 성장동력으로 점 찍은 신경망처리장치(NPU), 자동차용 반도체와 같은 분야에서도 쉽지 않은 경쟁을 치러야 한다.
M&A를 위한 실탄은 충분하다. 올해 상반기 기준으로 삼성전자의 현금 보유액(현금 및 현금성 자산, 단기금융상품)은 총 113조444억원 수준이다.
지난달 이 부회장의 네덜란드 방문 이후 차량용 반도체 1위 기업인 NXP에 대한 M&A 추진 가능성이 고개를 들고 있다. 삼성전자는 NXP와 지난해 8월 자율주행에 적용될 무선통신기술 초광대역(UWB) 표준 제정을 위한 컨소시엄을 함께 발족하는 등 협력 관계도 이어오고 있다. 그러나 2018년 퀄컴이 NXP 인수를 추진할 당시 제시했던 인수 가격이 삼성전자 보유 현금의 절반에 달하는 440억 달러(약 54조)에 이르는 점은 부담이다.
이 부회장의 재판일정 역시 인수합병과 같은 중요한 사안을 추진하는 데 장애요소가 될 수 있다. 지난달 국정농단 파기환송심 등 재판 일정이 시작됐고, 특히 경영권 승계 관련 재판은 이제 막 1심이 시작된 상황이라 적어도 2~3년은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 한 재계 관계자는 “총수의 승인 없이 대형 M&A를 추진하기 어렵다는 점 등을 고려하면 최근의 사법리스크가 삼성전자는 물론 AI 반도체 육성 등 국가경제 발전에도 뼈아프게 작용할 것”이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