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코는 주장하지 않는다. 보여줄 뿐이다. 끊임없이. 그래서 축적된 지식은 백과사전처럼 방대하다. 하지만 완벽하지는 않다. 방대해질수록 또렷해지는 건 피할 수 없는 불완전성이다. 소설 ‘장미의 이름’ 프롤로그에서 그는 토로한다. “진리는 우리 앞에 명백히 드러나지 않는다.” 진리란 원래 그런 것이다.
1권 고대ㆍ중세, 2권 근대 편에 이어 3권 현대 편 출간으로 ‘경이로운 철학의 역사’ 시리즈가 완간됐다. 유럽 문명사를 다루는 ‘온라인 아카이브’ 프로젝트 ‘엔사이클로미디어(Encyclomedia)’의 철학 부문이다. 에코가 이탈리아 볼로냐대 철학과 교수 리카르도 페드리가와 함께 시리즈를 기획하고 엮었으며, 집필에도 참여했다.
초점은 철학자들과 그들이 살았던 시대 간 상호작용이다. 말하자면 철학의 문화사다. 딱딱한, 전형적인 사상사가 아니어서 소설처럼 읽힌다. ‘장미의 이름’처럼 흥미진진하다.
독일 관념주의에서 출발, 20세기 철학과 과학으로 끝나는 3권에서는 헤겔, 마르크스, 니체, 푸코, 한나 아렌트 등 철학자뿐 아니라 다윈, 튜링, 마리 퀴리, 아인슈타인 같은 과학자들, 토크빌, 카뮈, 칸딘스키 같은 다양한 분야 전문가들이 등장한다. 정신(인간)과 자연이 분리되고 연역에서 귀납, 관념에서 경험으로 방법과 기준이 옮겨가면서 백화제방에 이르는 현대 철학사의 흐름이 드러난다.
에코의 다원주의가 내용은 물론 형식에도 관철된다. 저자가 83명이나 되는 만큼 글의 형태와 성격이 다양하다. 전형적인 연대기 형식의 철학사를 담은 글에 깊이 있는 해설이나 짤막한 기사가 주석처럼 붙어 있다. 이 관계의 가지는 끝도 없이 뻗는다. 책이 두꺼운 게 당연하다.
문은 독자에게도 열린다. 철학사를 소설처럼 읽으려면 다양한 철학적 관점 간 관계를 파악하려는 독자의 자발적 노력이 요구된다. 저자 움베르토 에코. 따로 설명이 필요할까 싶다. 소설가 이전에 철학ㆍ미학ㆍ기호학ㆍ언어학 등을 두루 섭렵한 학자다. 안 그래도 사회학자 김호기는 배타적 포퓰리즘 시대에 필요한 건 에코의 다원주의적 상상력이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