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경제와 맥을 같이해 온 고(故)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은 중요한 골목마다 어록을 쏟아냈다. 핵심적인 메시지로 기업 안팎의 상황 진단과 향후 방향까지 제시했다. 1993년 당시 독일 프랑크푸르트로 임원들을 불러 놓고 "마누라와 자식 뺴고 다 바꾸라"고 지시한 질책은 아직까지도 각 기업 경영에서 회자되고 있다. 이 회장이 생전에 남겼던 주요 어록을 살펴봤다.
미국과 일본이 꽉 잡고 있던 반도체 시장에 진출한 건 기존 경영진과 선친의 반대를 무릅쓴 이 회장의 개인적 결단이었다. 1974년 12월 동양방송 이사였던 그가 “기술 식민지에서 벗어나는 일, 삼성이 나서야 합니다. 사재를 보태겠습니다”라며 한국반도체 지분 50%를 인수하면서 삼성의 반도체 역사가 시작됐다. 1983년 삼성전자는 당시 세계시장 주력 제품이었던 64K D램 자체 개발에 성공하면서 세상을 놀라게 했다.
1993년 반도체 공정 새 라인을 깔 때 이 회장은 세계 표준인 6인치 웨이퍼(집적회로를 만들 때 쓰는 실리콘 원판) 대신 8인치를 고집했다. “남들 따라 가다간 경제 후진국 신세를 면치 못한다”는 게 이유였다. 이 회장은 그 해 6월 "국제화 시대에 변하지 않으면 영원히 2류나 2.5류가 될 것이며, 지금처럼 잘해봐야 1.5류"라며 변화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이 회장의 이 같은 변화에 대한 집념은 '반도체 코리아'의 시작이 됐다. 지난해 반도체 수출액은 951억6,000만달러로 전체 연간 수출액의 17.5%에 달한다.
‘자식과 마누라를 빼고 다 바꾸라’던 신경영 선언 때 그는 매우 화가 나 있었다. 1993년 1월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시내 가전제품 매장에서 아무도 찾지 않는 구석에 먼지만 잔뜩 쌓인 채 놓인 삼성 TV를 목격하면서다. 같은 해 6월, 불량인 세탁기 뚜껑을 발견하고도 칼로 튀어나온 부분을 대충 깎아가며 조립한다는 사실이 사내 방송(SBC) 고발 프로그램으로 알려지면서 그의 분노는 더욱 커졌다.
충격을 받은 그는 임원진들에게 호통쳤다. “(내가) 후계자가 되고부터 모든 제품의 불량은 암이라고, 암적 존재라고 말해왔다. 암은 진화한다. 초기에 자르지 않으면 3~5년 내에 죽게 만든다. 정신들 차려라.” 이후 삼성전자에는 세탁기 생산 현장에서 불량이 나오면 즉시 라인을 멈추고 문제 해결 뒤 라인을 재가동하는 ‘라인스톱제’가 생겼다.
하지만 문제는 계속 됐다. 이듬해 말 삼성전자 휴대폰(애니콜) 불량률이 11.8%에 달하며 소비자 불만이 커지자 이 회장은 충격 요법을 결심한다. 1995년 3월 구미사업장에 불량 휴대폰 등 150억원 규모의 수거된 제품 15만대를 쌓고 불태워버렸다. 그는 “비싼 휴대폰, 고장 나면 누가 사겠나? 반드시 1명당 1대의 무선 단말기를 가지는 시대가 온다. 품질에 신경 써라”고 임원들을 다그쳤다.
일명 ‘애니콜 화형식’이라고 불리는 이 사건은 2016년 ‘갤럭시노트7 전량 리콜’ 사태와 비교되기도 한다. 배터리 발화 논란이 불거지자 삼성전자는 제품 출시 13일 만에 그 동안 생산한 250만대 전량 리콜을 결정했다. 갤럭시노트7 불량률은 0.0024%였다. 리콜 규모만 1조~1조5,000억원으로 무선사업부 영업이익의 25~30% 수준이었지만 일시적 타격을 입더라도 품질에 대한 신뢰를 끌어올리겠다는 결단이었다.
이 회장은 또 생전 기업에 대한 강한 규제와 정치인들의 권위의식 비판도 서슴지 않았다. 1995년 4월 중국 베이징(北京)에서 진행된 기자간담회에서 그는 "우리나라 정치는 4류, 행정은 3류, 기업은 2류"라며 "우리나라에서는 반도체 공장을 지으려면 도장 1,000개를 찍어야 한다. 이대로 가다간 우리나라는 2류 국가 축에도 끼지 못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 회장의 작심 발언은 '정치 보복'으로 돌아왔지만, 사회적으로는 깊은 공감을 받았다.
이 회장이 디자인에 주목한 건 1993년이다. 프랑크푸르트에서 이 회장은 "앞으로 세상에선 디자인이 제일 중요해진다"며 "성능이고 질이고 이제 생산 기술이 다 비슷해지기 때문에, 앞으로 개성을 어떻게 하느냐 디자인을 어떻게 하느냐(가 중요해진다)"고 짚었다. 1996년에는 단순히 상품의 겉모습이 아니라 기업의 철학이 담겨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21세기에는 디자인 경쟁력이 기업 경영의 승부처가 될 것이다”고 전망했다. 이에 삼성전자 내부에서는 1996년을 ‘디자인 혁명의 해’라고 부른다.
2000년대 들어 삼성의 디자인 역량은 빛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2000년 당시 기준으로 사상 최대인 7조4,400억원의 영업이익을 올린 삼성전자는 자금을 디자인에 투자했다. 2001년 최고경영자(CEO) 직속으로 ‘디자인경영센터’를 둘 정도였다. 이 회장이 직접 제품 개발에 관여해 ‘이건희폰’으로 불렸던 애니콜 SGH-T100 모델은 2002년 4월 출시 후 판매량 1,000만대 돌파에 성공했다. 조약돌처럼 생긴 디자인에 세계에서 가장 먼저 컬러 액정표시장치(LCD)를 탑재해 큰 인기를 끌었다.
이후에도 네모난 박스 형태의 디자인 일색 이었던 TV 시장에 T자형, V라인 등 새로운 디자인을 내놓으며 기존 사각형 구도를 깨는 시도를 했다. 대표적으로 2006년 출시된 TV ‘보르도’는 차기작까지 1,000만대가 팔려 소니를 제치고 삼성을 단숨에 TV 시장 세계 1위로 끌어올렸다. 1996년 이후 삼성전자가 해외 디자인 어워드에서 받은 수상 기록만 1,000여개에 달한다.
이 회장은 누구보다 인재경영을 강조했던 인물이다. 그의 어록을 모아놓은 주요 저서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말 중 하나가 ‘인재’다. “탁월한 한 명의 천재가 10만~20만 명의 직원을 먹여 살리는 인재 경쟁의 시대다.”(2002년 6월 인재전략사장단 워크숍) “불투명한 미래를 위한 준비 경영은 설비 투자가 아니라 세상이 어떻게 변하든 미래를 책임질 수 있는 천재급 인재 확보다.”(2003년 6월 경영지침 발표) “글로벌 기업으로 크려면 최고의 인재를 최고의 대우를 해서 과감히 모셔와라.”(2012년 삼성중공업 사장단 오찬) 등 그는 꾸준히 인재 육성을 주창했다.
여성 인력의 중요성도 수차례 강조했다. 이 회장은 1997년 펴낸 에세이 '생각 좀 하며 생각을 보자'에서 "국가 차원에서 저렴한 비용으로 이용할 수 있는 탁아소나 유치원 시설을 많이 제공함으로써 여성이 사회생활을 하는 데 따르는 경제적 부담을 줄여줘야 한다"며 "여자라는 이유로 채용이나 승진에서 불이익을 준다면 이에 따라 당사자가 겪게 될 좌절감은 차치하고라도 기업의 기회 손실은 무엇으로 보상할 것인가"라고 되물었다. 2011년 8월 여성임원 오찬 자리에서는 "여성임원은 사장까지 올라 본인의 뜻과 역량을 다 펼쳐야 한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2014년 5월 급성심근경색으로 쓰러지기 전 마지막으로 남긴 그 해 신년사에서도 이 회장은 “남보다 높은 곳에서 더 멀리 보고 새로운 기술, 새로운 시장을 만들어 냅시다. 미래를 대비하는 주역은 바로 여러분입니다”고 말했다.
결국 그는 1987년 회장 취임 당시에 한 “인재를 양성하고 인화(人和)와 단결로 1990년대까지 세계적인 초일류기업이 되겠다”는 약속을 지켰다. 그의 거침없는 행보와 함께 한국 경제도 들썩였다. 1987년 한국 실질 국내총생산(GDP)는 319조원, 삼성그룹의 매출은 17조원이었다. 지난해 한국의 실질 GDP는 1,849조원으로, 삼성그룹 16개 상장사의 매출총액은 374조원으로 불어났다. 한국 실질 GDP 중 삼성그룹이 떠받친 비중은 30년 전 5.3%에서 20.2%까지 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