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대전 당시 소비에트 여군은 간호병이나 후방 참모 부대뿐 아니라 최전방에서 저격수나 포병, 전차병으로도 활약하며 큰 전과를 올렸다. 전차병 마리야 옥차브르스카야(Mariya Oktyabrskaya, 1905~1944)는 붉은 군대 최고의 영예인 '소비에트 영웅' 칭호와 금성영웅훈장을 받았다.
우크라이나에서 태어나 통조림회사 직공, 전화교환수 등으로 일하던 그는 1925년 군 장교와 결혼한 뒤 남편에게서 무기 사용법과 운전 등 기술을 익혔다고 한다. 1939년 나치 침공으로 전쟁이 시작되면서 남편은 전장으로, 그는 후방 시베리아로 이주했다. 남편이 1941년 키예프 전투에서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게 된 건 2년 뒤였다.
그는 전재산을 처분해 전쟁기금으로 기부하며 소련국방위원장에게 편지를 썼다. '나에게 탱크로 복수할 기회를 달라'는 내용이었다. 전시 간호 기술도 익혔지만 그는 전투에 더 끌렸고 "군인의 아내는 영예뿐 아니라 책임감도 함께 지녀야 한다"고 말하곤 했다고 한다.
위원회는 이례적으로 그의 요청을 승인, 약 5개월간 탱크 기동ㆍ정비 훈련을 받게 한 뒤 동부전선에 투입했다. T-34 탱크 회전포탑에 'Fighting Girlfriend(전장의 연인)'이란 의미의 키릴 글귀를 직접 새긴 만 38세의 마리야는, 1943년 10월 21일 나치와의 첫 전투에서 적의 집중 포화 속에 해치를 열고 나가 고장난 탱크 궤도를 수리하는 투혼을 발휘, 그를 사기 진작을 위한 '쇼걸'쯤으로 여기던 동료 전차병들의 콧대를 꺾고 단숨에 중사로 진급했다. 집과 재산까지 처분한 그는 모든 전투를 배수진으로 임했고, 병사들은 그를 투지의 아이콘으로 존경했다.
옥차브르스카야는 이듬해 1월 17일 레닌그라드 공성전 전장 한복판에서 대전차포에 파손된 탱크 수리를 마친 뒤 포탄 파편에 머리를 맞고 쓰러졌고, 키예프 인근 군병원으로 후송돼 약 두 달을 의식없이 버티다 숨을 놓았다. 국방위원회는 최고훈장을 그에게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