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4일 오후 6시7분, 베이루트 항구 12번 창고(압류품 저장고)에서 발생한 대폭발은 레바논 정부와 권력층을 향한 시민들의 쌓인 분노도 함께 터뜨려버렸다. 창고에 저장된 2,750톤의 질산암모늄을 정부가 제대로 관리하지 못해 두 차례 폭발이 일어났고, 200명이 넘는 목숨을 앗아간 대참사로 이어졌다. 다친 이도 6,500명이 넘는다. 참사 후에도 레바논은 조용하지 않았다. 엿새 뒤 베이루트 항구 면세구역의 기름, 식량, 타이어 등을 적재한 창고에서 다시 대형 화재가 발생했다. 한 달 뒤 9월 22일엔 베이루트에서 50㎞ 떨어진 남부 아인카나 지역의 이슬람 무장정파 헤즈볼라 무기고에서 폭발사고가 터졌다.
바람 잘 날 없는 상황이 이어지자 ‘이스라엘 공격설’ ‘헤즈볼라 개입설' 등 온갖 음모론이 난무했다. 취소하긴 했지만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공격에 의한 폭발’, 미셸 아운 레바논 대통령의 ‘외부 개입 가능성’ 주장도 가짜뉴스 확산에 기여했다. 수많은 음모론은 사실 여부를 떠나 레바논이 일명 ‘모자이크 국가’라는 점을 상기시켰다. 권력이 종교ㆍ종파의 인구비에 따라 배분돼 있고, 내전 및 이웃국가와 전쟁으로 점철된, 혼란스러운 근ㆍ현대 역사를 다시금 떠올리게 했다.
2020년의 레바논을 이해하려면 1948년 이스라엘 건국부터 들여다 봐야 한다. 10년 단위로 4차례 일어난 이스라엘과 주변 아랍국가들의 전쟁, 이른바 ‘중동전쟁’을 거치며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요르단, 시리아, 레바논 등으로 이주해 난민촌을 형성했다. 특히 망명정부 격인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 본부가 요르단에서 쫓겨나 레바논에 터를 잡았다. 하지만 기독교도 민병대원과 팔레스타인 난민간 갈등이 싹텄고, 결국 1975년 15년 동안 레바논을 뒤흔든 내전이 발발했다. 여기에 레바논에 주둔한 시리아군은 또 다른 분쟁 요인이 됐다. 1976년 5월 당시 레바논 대통령의 요청으로 좌익 세력과 팔레스타인 동맹군 축출을 목적으로 레바논에 입성한 시리아군은 2005년까지 떠나지 않았다.
1970년대 중ㆍ후반은 레바논 내 종교ㆍ종파간 인구비율이 역전되는 시기이다. 비공식 통계에 따르면 1977년쯤 ‘기독교도 140만명 대 무슬림 170만명’으로 역전됐다. 이 즈음 시아파 무슬림 수가 대략 90만명에 이르게 돼 마론파 기독교(80만명)와 수니파 무슬림(60만명)을 뛰어 넘는 최대 종파로 성장했다. 헤즈볼라의 정치권력 재배분 요구가 거세진 것도 이 때부터다.
레바논 내전에는 헤즈볼라와 시리아, 이스라엘 등 중동지역의 수많은 정치세력이 얽혀 있었다. 1976년 10월 아랍연맹은 외교장관들 결의로 레바논에 주둔한 아랍평화유지군 규모를 대폭 확대하기로 했는데, 이에 따라 조직된 아랍억지군은 시리아군을 중심으로 재편됐다. 또 내전 중이던 1982년 8월 이스라엘은 PLO 군사조직 파타 축출을 명분으로 레바논을 전격 침공했다. 이후 레바논은 이스라엘군, 시리아군, 유엔평화유지군, 다국적 평화유지군(MNF)이 각축전을 벌이는 ‘불안한 공존’을 이어갔다. 국가에는 ‘중동의 스위스’, 수도 베이루트에는 ‘중동의 파리’라는 별칭이 붙을 만큼 아름다웠던 레바논은 그렇게 무너져갔다.
오랜 내전은 1989년 9월 타이프 협약으로 의회 권력이 재분배되면서 막을 내렸다. 그러나 폭력까지 사라지지는 않았다. 2000년대 들어 이란과 시리아의 군사 지원을 받아 급부상한 헤즈볼라가 이스라엘에 대한 테러와 공격을 확대하면서 양측간 긴장 수위가 크게 높아졌다. 2006년에는 2차 이스라엘-레바논 전쟁이 터졌다가 한 달 만에 휴전하기도 했다.
레바논 내부 정치 상황도 악화일로였다. 지난해 10월 시아파 중심인 중동 ‘시아벨트’ 국가들에서 반(反)체제ㆍ반정부 시위가 불붙었고, 이 지역 서쪽 끝자락에 위치한 레바논도 예외는 아니었다. 왓츠앱 등 메신저 프로그램 이용에 대한 정부의 세금 인상 계획은 대규모 시위를 불렀다. 이미 무능하고 부패한 정치인과 관료들을 바라보는 시민들의 시선은 싸늘했고, 시위 양상은 점점 폭력으로 치달았다. 860억달러(99조원)에 달하는 막대한 국가부채(국내총생산의 150%)와 통화가치 하락, 35세 미만 청년실업률 35%, 전기ㆍ상수도 등 공공서비스 결핍, 2011년 이후 시리아 난민 150만명 유입 등 곪을대로 곪은 국가의 환부가 일거에 드러났다.
반정부 시위는 점차 종파간 갈등으로 비화했다. 헤즈볼라 지지자 수십명이 베이루트 시위 현장에서 시민들을 공격하면서 폭력 사태는 악화했다. 급기야 북부 도시 트리폴리에서는 기독교 마론파인 아운 대통령 지지 세력과 시위대가 충돌해 15년 내전이 재연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마저 나왔다. 역설적으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대유행은 레바논을 포함한 중동 분쟁을 잠잠하게 만들었는데, 바로 이 때 대폭발 참사가 발생한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중동에서 수많은 이들을 죽음으로 몰아 넣는 종교ㆍ종파 갈등의 시작은 프랑스 식민통치 당시로 거슬러 올라간다. 1916년 사이크스-피코 협정을 통해 영국과 프랑스는 오스만제국 영토를 분할 점령했다. 레반트 지역을 위임 통치하게 된 프랑스는 제멋대로 영토를 쪼개 시리아와 레바논을 건설했고, 내부 세력을 이간질하며 지배력을 유지했다.
프랑스가 1920년 마론파 기독교도 중심의 마운트 레바논의 경계를 트리폴리, 베이루트, 시돈, 사이다, 베카계곡 및 내륙 평원지대로 확장해 대(大)레바논을 수립한 지 올해로 꼭 100년이 됐다. 프랑스는 1932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공식 인구조사를 실시해 이를 근거로 1943년 종교ㆍ종파간 권력을 분배했다. 곧 이어 민주공화제를 표방하는 세속적 정치ㆍ경제체제 구축을 통해 레바논 근대 국민국가를 수립했다. 마운트 레반트 지역에 18개 종파를 아우르는 프랑스식 이상국가 건설이 당초 목표였다. 프랑스는 레바논에 대혁명의 가치인 자유ㆍ평등ㆍ박애 정신을 구현하려 했다. 당연히 프랑스 문화가 대거 이식됐고, 베이루트도 중동의 파리란 명성을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프랑스가 설계한 이상국가 실험은 100년 만에 완벽한 실패로 귀결된 듯하다. 지지부진한 국민통합 작업 탓에 여전히 ‘건설 중’인 국가이고, 헤즈볼라와 같은 ‘국가 내 국가’가 있는 나라로 전락했다.
대폭발 참사 아후 사회 혼란이 두드러지자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베이루트를 ‘깜짝’ 방문했다. 그는 이 자리에서 레바논 정치권에 뼈를 깎는 반성과 철저한 개혁을 요구했다. 일종의 내정 간섭으로 볼 수 있지만 레바논 국민은 그의 방문을 열렬히 환영했다. 이런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특정 사건을 계기로 내전의 국제화는 얼마든지 다시 불거질 수 있다. ‘분쟁의 항상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나라가 레바논이다. 평화유지군으로 가 있는 우리 동명부대의 주둔 기간이 더 길어질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