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신의를 택한 아일랜드 독립 영웅

입력
2020.10.06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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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 찰스 스튜어트 파넬


19세기 초 영국에 강제 합병된 이래 아일랜드 독립운동은 크게 두 갈래로 진행됐다. 영국 진보정당(휘그당)에 진출해서 자치 확대를 추구한 합법 운동과 투쟁을 통한 독립운동. 변호사 출신 하원의원 대니얼 오코널이 전자의, 청년 아일랜드당 설립자 윌리엄 오브라이언이 후자의 뿌리였다. 오코널은 1845년 아일랜드 대기근 이후 한계를 드러낸 채 지지 기반을 상실했고, 오브라이언은 1848년 반란 주동자로 체포돼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수많은 이들이 대기근 여파로 이민을, 반란과 탄압을 피해 망명을 떠났다. 그들 해외 아일랜드인들이 후원 조직 '페니언단'을 만들고, 잔류 혁명파를 주축으로 '아일랜드 공화주의 형제단'을 재건했지만, 큰 영향력을 발휘하진 못했다.

1870년 아이작 버트가 '자치연맹(1879년 아일랜드 국민당)'을 창당했다. 합법 기반 위에 대중의 실력 투쟁을 가미한 일종의 중도였고, 실질적 리더가 찰스 스튜어트 파넬(Charles Stewart Parnell, 1846.6.27~ 1891.10.6)이었다. 프로테스탄트 대지주 집안에서 태어난 반영 민족주의자인 그는 1875년 자치연맹 소속 하원의원이 됐고, '토지연맹' 의장으로 추대돼 1880년 소작농 보이콧을 비롯한 토지전쟁을 주도해 이듬해 토지법 개정안을 쟁취했다. 직후 당 총재에 취임, 1885년 총선에서 하원 86석을 차지해 휘그당과 함께 '아일랜드 자치법(Home Rule Bill)'을 상정하기도 했다. 물론 영국 보수당과 지주의 견제는 거셌다. 살인교사 누명을 씌우기도 했다.

그는 1880년 지주 측 협상 상대였던 윌리엄 오세어(William O'shea)의 아내 캐서린을 사랑했다. 한눈에 반한 둘은, 유산을 노린 윌리엄의 묵인하에 이혼 불가를 조건으로, 약 10년간 아이 셋을 낳고 함께 살았다. 하지만 상속을 못 받게 된 오세어가 뒤늦게 '불륜'을 폭로하면서 파넬은 '가정파괴범'으로 몰려 은퇴했다. 1891년 만 45세의 그는 캐서린과 결혼했고, 4개월 뒤 폐렴으로 별세했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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