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 사과 이틀 만에 적반하장...진상규명 외면

입력
2020.09.27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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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시신 수색 영해 침범" 엄포...
공동조사 수용 가능성 낮아


북한이 27일 서해에서 실종됐다가 북한군 총격을 맞고 사망한 공무원 A씨(47)의 시신 수색에 나선 남측을 향해 "북측 영해를 침범하고 있다"며 "이를 중단하지 않으면 불미스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고 엄포를 놓았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25일 공개 사과한 지 이틀만에 태도를 바꿔 적반하장식 요구에 나선 것이다. 김정은 국무위원장 사과로 남북관계 파탄을 막긴 했으나 이번 사건에 대한 진상 규명은 외면한 채 서해 북방한계선(NLL)에 대한 해묵은 불만만 제기해 남북간 갈등이 계속될 전망이다.

북한은 이날 '남조선 당국에 경고하다'는 제목의 조선중앙통신 보도문을 내고 "우리는 남측이 새로운 긴장을 유발할 수 있는 서해 해상군사분계선 무단침범 행위를 즉시 중단할 것을 요구한다"고 밝혔다. 북한은 남측 해군과 경찰이 A씨 시신 수색과정에서 북측 수역을 침범했다고 주장하면서 "남측이 자기 영해에서 그 어떤 수색 작전을 벌리든 개의치 않지만 영해침범은 절대로 간과할 수 없다. 이에 대해 엄중히 경고한다"고 강조했다. 우리 군 관계자는 "NLL 이남에서 정상적으로 수색 활동 중"이라고 밝혀, 북한의 영해 침범 주장은 북한이 1999년 서해 군사경계선으로 일방적으로 선포한 서해 해상 경비계선에 근거한 것으로 풀이된다. 서해 NLL을 부인해온 북한이 해묵은 서해 군사경계선 문제를 재차 끄집어낸 것이다.



이는 북한이 남측의 시신 수색에 협조하기는커녕 훼방을 놓은 것으로 이번 사건에 대한 북한의 사과 진정성과 진상 규명 의지를 의심케 하는 대목이다. 실제 북한은 이날 보도문에서 "남측에 벌어진 사건의 전말을 조사 통보했다"며 지난 25일 통일전선부 명의의 통지문에서 자체 조사 결과를 이미 통보한 점을 부각시켰다. 또 "서남해상과 서부해안 전 지역에서 수색을 조직하고 시신을 습득하는 경우 관례대로 남측에 넘겨줄 절차와 방법까지도 생각해두고 있다"고도 밝혔다. 이는 결국 '조사 결과는 이미 통보했고 시신이 발견되면 남측으로 송환할테니 더 이상 우리를 자극하지 말라'는 메시지에 가깝다.

북한의 이 같은 적반하장식 엄포에 따라 남북 공동조사는커녕 북측의 자체적인 추가 조사도 기대하기 어려워진 게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북한은 지난 25일 청와대 앞으로 보낸 통지문에서 "대단히 미안하게 생각한다"는 김정은 위원장의 사과와 함께 A씨의 시신이 아니라 부유물을 소각했다는 내용의 사건의 경위도 전달해왔다. 만약 재조사 결과 상부 지시나 시신 소각 등의 내용이 나올 경우 북한 정권의 잔인성이 더욱 부각되고 공개 사과에 나선 김 위원장의 위신도 훼손될 수 밖에 없다.

2008년 7월 발생한 금강산 관광객 박왕자씨 피살 사건 때도 북한은 박씨를 향해 발포한 북한 군인에 대한 남측의 조사 요구를 거부했다. 이번 사건은 우발적 총격이 아니라, 해상에서 표류중인 민간인을 의도적으로 사살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점에서 북한으로선 진상 규명 요구를 더욱 회피할 것이란 게 대체적 분석이다. 조한범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최고 지도자가 공개 사과까지 했으니, 적당히 넘어가자는 게 북한의 의중으로 보인다"며 "다만 국제사회 시선이 김 위원장에게 쏠린 점을 감안하면 차후 자체적인 추가 조사나 일부 책임자 문책을 통해서 사태를 마무리 짓고자 할 여지는 남아 있다"고 말했다.



조영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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