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운 시기 넘겼다"던 오인혜, 어떤 배우였나

입력
2020.09.15 11:28


“요즘은 왜 연기 활동 안 하냐는 이야기를 들을 때 가장 힘들어요. 나도 나가고 싶은데. 그러다 보니 사람들 만나는 것도 싫어지더라고요. 그런데 그런 시기를, 고비를 넘겼어요. 지금 제가 괜찮아졌다고 말하는 건 난 지금 뭐든지 기회가 오면 역할이 작거나 좀 마음에 안 들어도 받아들일 수 있고 내려놨다는 얘기에요.”

15일 3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배우 오인혜가 지난달 유튜브 채널 ‘근황올림픽’과 나눈 인터뷰 내용이다. 당시 그는 심적으로 어려운 시기를 넘겼다면서 밝은 표정으로 연기에 대한 의지를 밝혔다. 의식을 잃은 채 자택에서 발견되기 불과 이틀 전까지만 해도 고인은 자신의 유튜브 채널에 평소와 같은 쾌활한 목소리로 뷰티 관련 영상을 올리며 팬들과 인사를 나눴다.

오인혜는 14일 인천 송도 자택에서 의식을 잃고 쓰러진 채 지인에게 발견돼 병원으로 이송됐다. 심폐소생술 등 응급처치로 호흡과 맥박을 되찾긴 했지만 이날 밤 늦게 심정지 판정을 받고 세상을 떠났다. 경찰은 정확한 사망 경위를 조사 중이다.

고인은 중학생 시절부터 잡지ㆍ광고 모델에 출연하며 배우의 꿈을 키웠다. 동덕여대 방송연예과를 졸업한 그는 오랜 무명 시절을 겪은 뒤 2009년 ‘우리 이웃의 범죄’(2011년 개봉)에 단역으로 출연하며 꿈을 이뤘다. 오인혜는 당시 한 인터뷰에서 “데뷔 전 매니저에게 사기를 당한 적도 있고 출연 중이던 영화에서 내 배역이 다른 배우로 바뀌어 충격을 받아 1년 이상 아무런 활동도 못했다”라고 말했다.

주연 데뷔작은 ‘안개기둥’ ‘접시꽃 당신’ ‘301 302’ 등으로 유명한 박철수 감독과 신인 김태식 감독이 공동 연출한 ‘붉은 바캉스 검은 웨딩’(2011)이었다. 그는 선배 배우 안지혜에게 “박철수 감독이면 두 말 않고 하라”는 조언을 듣고 출연을 결심했다.

'붉은 바캉스 검은 웨딩'은 아내 몰래 여성들과 불륜 관계를 맺는 대학 교수의 이야기를 두 개의 에피소드로 엮은 영화다. 에로티시즘을 전면에 내세우지만 흑백과 컬러가 교차하고 과거와 현재, 상상과 현실이 뒤섞인 다분히 실험적인 작품이다. 오인혜는 두 번째 에피소드에서 불륜 관계를 맺고 있던 교수에게 주례를 서달라고 부탁하는 팜 파탈 캐릭터 수지 역을 연기했다.

‘붉은 바캉스 검은 웨딩’은 개봉을 앞두고 2011년 부산국제영화제에 초청됐다. 오인혜는 영화제 개막식에 파격적인 드레스를 입고 레드카펫에 등장했다. 당시 그의 드레스 연출은 센세이션에 가까워 오래도록 영화제나 시상식의 노출 의상에 관한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회자되곤 했다.

‘빨간 드레스’는 오인혜라는 배우의 존재를 세상에 널리 알린 계기도 됐지만 족쇄가 되기도 했다. 그는 이후 박철수 감독의 ‘생생활활’(2013)을 비롯해 ‘소원택시’(2013), ‘야누스: 욕망의 두 얼굴’(2014), ‘설계’(2014) 등의 영화에 출연했다. 대부분 저예산 영화였고 맡은 배역은 성적인 이미지를 강조하거나 치명적인 매력의 팜 파탈 캐릭터가 주를 이뤘다. 신은경 주연의 ‘설계’에 출연하던 당시 그는 “대중에게 친근하고 친숙한 모습으로 다가가고 싶은데 쉽지 않다”고 토로하기도 했다.

2018년 MBN 드라마 ‘연남동 539’에 특별출연으로 잠시 등장하긴 했지만 그는 ‘설계’ 이후 6년간 연기활동을 하지 못했다. 고인은 ‘근황올림픽’ 인터뷰에서 “(빨간 드레스) 이미지로 인해 몇 편의 작품은 찍었지만 거기까지였다”며 “다른 이미지로 연기할 수 있는데 그런 캐릭터는 제의가 들어오지 않았다”고 말했다. “노출 장면이 있고 남자 꼬시는 치명적인 팜 파탈 역할만 들어오는데 난 사실 치명적이지도 않고 오히려 맹한 편"이라며 "똑같은 캐릭터만 들어와 조금 지쳤던 것 같다”고도 했다.

고인은 올 초부터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며 팬들과 소통을 이어가고 있었다. 구독자 수는 많지 않았지만 6개월간 40여개의 동영상을 올리며 자신의 일상을 공유했다. 지난달에는 가수 노틸러스의 신곡 ‘차라리’에 참여하며 음악적 재능을 선보이기도 했다.

고인의 빈소는 인하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다. 발인은 16일이다.

고경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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