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노이 북미정상회담 결렬은 핵시설 5곳 폐쇄 합의 불발 때문?

입력
2020.09.14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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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5곳 폐쇄" 김정은 "영변 충분" 결렬 
평양 강선 우라늄농축시설 두고 공방한 듯
김 "한미연합훈련 취소 안해 분명히 불쾌"
교착 장기화 이유 설명... "연인에게 실망"

지난해 2월 베트남 하노이 2차 북미정상회담 결렬은 북한 핵시설 5곳 폐쇄를 둘러싼 공방 때문이었다는 구체적 정황이 공개됐다. 그 해 6월 판문점 회동 후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에게 한미연합군사연습이 취소되지 않은 점에 강한 불만을 제기한 사실도 새롭게 밝혀졌다. 밥 우드워드 워싱턴포스트(WP) 부편집인의 책 ‘격노’에 담긴 추가 폭로 내용이다.

12일(현지시간) 미 언론에 따르면 하노이 정상회담 당시 트럼프 대통령은 북한 핵시설 폐쇄 숫자를 놓고 김 위원장을 끝까지 압박했다. 그는 영변 한 곳만 폐쇄하겠다는 김 위원장에게 5곳 폐쇄를 요구했다. “하나는 도움이 안 되고, 둘도 셋도 넷도 도움이 안 된다. 다섯은 도움이 된다.” “나는 그 모든 시설을 알고 있다.”

이에 대해 김 위원장은 영변이 북한 핵시설 가운데 가장 큰 곳이라고 반박했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그것(영변)은 또한 가장 오래된 곳”이라고 역공을 가했다. 김 위원장은 끝까지 양보하지 않았고 트럼프 대통령은 “당신은 합의할 준비가 안 돼 있다”며 회담을 결렬시켜 김 위원장에게 충격을 안겼다고 한다.

당시 가장 논란이 됐던 시설은 평양 천리마구역 인근 강선 핵시설로 보인다. 북한은 영변 두 배 크기인 강선 우라늄농축시설을 2010년부터 운영했는데 미 정보당국은 2018년 6월 이곳을 비밀시설로 지목했다. 강선 핵시설은 국제원자력기구(IAEA) 2020년 보고서에서도 정기적인 차량 이동 등 지속적인 활동이 이뤄지고 있다고 지목된 곳이다. 강선 외에도 북한 최대 우라늄광산인 평산광산과 우라늄정련공장 등도 5곳에 포함됐을 가능성이 있다.

책에는 또 2017년 이후 북미관계 뒷얘기도 담겼다. 북미 간 긴장이 고조되던 2017년 8월 짐 매티스 당시 국방장관은 북한 탄도미사일 발사에 대응해 북한 항구 한 곳 폭격을 고민하다 전면전을 우려해 단념했다는 내용이 나온다고 한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해 12월 인터뷰에선 우드워드의 '우리가 북한과 전쟁 직전까지 갔던 것으로 알고 있다'는 질문에 "맞다. 그 누가 아는 것보다 훨씬 가까이 갔었다"고 답하기도 했다.

2018년 6월 싱가포르 1차 북미정상회담 합의 후 추가 조치가 이뤄지지 못한 이유는 북한의 6ㆍ25전쟁 종전선언 합의 요구를 트럼프 대통령이 거부했기 때문이라는 언급도 있었다. 김 위원장은 같은 해 9월에는 “위성발사구역, 즉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관련 시설이나 핵무기시설의 완전한 폐쇄, 핵물질 생산시설의 돌이킬 수 없는 폐쇄” 의향도 설명한 것으로 전해졌다. 그러나 2019년 2월 하노이회담 결렬에 이어 같은 해 6월 판문점 남ㆍ북ㆍ미 3국 정상회동에서도 돌파구를 찾지 못하면서 북미 핵협상은 교착상태에 빠져 있다.

양측 간 교착이 길어진 이유를 한미연합훈련에 대한 김 위원장의 불만에서 읽을 수 있는 정황도 나왔다. 김 위원장은 판문점 회동 한 달여 후인 8월 5일 트럼프 대통령에게 보낸 친서에서 “도발적인 연합군사훈련이 주요 이슈를 논의할 두 나라의 실무 협상에 앞서서 취소 또는 연기될 것으로 믿었다”며 “한반도 남쪽에서 벌어지는 연합군사훈련은 누구를 상대로 하는 것이며, 누구를 저지하려는 것이며, 누구를 패배시키고 공격하려는 의도인가”라고 반문했다. 판문점 회동을 통해 협상을 이어갈 동력이 마련됐음에도 8월 연합훈련이 취소되지 않은 데 대한 분노를 직접적으로 표출한 것이다. 그는 “개념적으로 가설적으로 전쟁준비 훈련의 주 타깃은 우리 군" “한국군은 우리 군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 “나는 분명히 불쾌하고 이 감정을 당신에게 숨기고 싶지 않다” 등 불편한 심기를 여과 없이 내비치기도 했다. 우드워드는 “두 사람의 관계가 영원히 식을 수도 있다는 메시지”라며 “마치 친구나 연인에게 실망한 것처럼 보였다”고 해석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3월 인터뷰에선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상황과 관련, "북한에서도 그들이 호되게 당하는 중인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당시 북한은 코로나19 확진자가 없다고 발표한 상황이었다.

그는 김 위원장이 전한 고모부 장성택 전 노동당 행정부장 처형 전후 상황도 우드워드에게 털어놓았다. “그는 고모부를 죽였고 그 시신을 바로 계단에 뒀다. 잘린 머리는 가슴 위에 놓여 있었다.” AFP는 시신이 전시된 곳은 북한 고위 관리들이 사용하는 건물을 의미한다고 전했다. 처형 후 본보기로 시신을 전시했다는 얘기다. 장성택은 2013년 2월 국가전복음모죄로 처형됐다.

워싱턴= 정상원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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