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재민의 풋볼인사이드] 발렌시아의 위기는 이강인의 기회

입력
2020.09.10 04:30
21면


스페인 프로축구 프리메라라리가 명문 발렌시아가 내우외환에 시달리고 있다. 안에서는 주축 선수들이 대거 처분됐고, 팬들은 구단주 퇴진 운동 중이다. 새로 바뀐 감독은 차 포 뗀 팀을 데리고 새 시즌에서 경쟁해야 한다. 바깥에서 불어 닥친 코로나19 여파는 구단의 지갑을 쪼그라들게 한다. 혼돈의 어둠이 짙게 깔린 메스타야에서 유일하게 희망의 빛줄기를 받는 선수가 있다. 19세 미드필더 이강인이다.

지난 시즌 발렌시아는 라리가 9위를 기록했다. 시즌 초 팀을 잘 이끌던 마르셀리노 감독을 쫓아낸 뒤 받아 든 성적표였다. 마르셀리노 감독은 2019년 코파델레이 우승으로 발렌시아에 11년 만의 메이저 타이틀을 안긴 주인공이었다. 2시즌 연속 유럽축구연맹(UEFA) 챔피언스리그 출전으로 구단 수입 면에서도 혁혁한 공을 세웠다. 하지만 코파델레이 우승으로부터 4개월 뒤 싱가포르 출신 피터 림 회장과 불화로 물러나야 했다. 마르셀리노 감독은 “코파델레이 우승에 칭찬 한마디 듣지 못했다”라며 마음의 상처를 고백했다.

올 여름 발렌시아의 상황은 악화일로에 있다. 림 회장은 레전드 다니 파레호와 최대 미래주 페란 토레스를 처분해버렸다. 정상급 미드필더인 로드리구 모레노와 프란시스 코클렝까지 팔았다. 팬들은 자신들이 사랑하는 감독과 선수들이 1년 사이에 모두 사라지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주전 4인을 팔아 치운 대가가 합계 6,000만 유로에 그쳤다는 사실이 충격을 키웠다.

구단 레전드 산티아고 카니사레스조차 “메리턴(구단 소유 법인명)의 독선적 태도는 발렌시아 팬들에게 모욕을 주는 지경에 이르렀다. 팬들은 그들이 영원히 꺼져주길 원한다”라고 수뇌부를 비난했다. 림 회장의 딸이 엄지로 불난 집에 기름을 부었다. 본인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구단은 우리 것이다. 당신들은 아무것도 요구할 수 없다”라며 팬들을 비난한 것이다. ‘막장’ 포스팅은 삭제되었지만 림 회장과 팬 관계는 이미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넜다.

발렌시아의 혼돈은 역설적으로 이강인에게 큰 기회로 다가온다. 2017년 말 1군 데뷔 후 이강인은 지금까지 세 시즌 동안 라리가 출전 수가 20경기밖에 되지 않는다. 팀 내 높은 기대와 주전 경쟁 상황이 별개 문제였기 때문이다. 지난해 국제축구연맹(FIFA) 20세 이하(U-20) 월드컵에서 골든볼을 따냈던 포지션에는 절대적 레전드 파레호가 있었다. 측면 경쟁자들도 힘과 속도 면에서 이강인을 압도했다. 실전 경험을 위한 임대 추진은 번번이 발렌시아의 반대에 부딪혔다. 림 회장이 이강인을 아시아 마케팅을 위한 예비 카드로 묶어두길 원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올 여름이야말로 이강인이 발렌시아에서 탈출할 마지막 기회처럼 보였다.

그런데 상황이 급변했다. 단 몇 주 만에 경쟁자들이 한꺼번에 사라진 것이다. 에이스들의 일괄 처분 직후 발렌시아는 선수단 달래기에 나섰다. 이강인, 가야, 가브리엘 파울리스타에게 재계약을 제안한 것이다. 발렌시아가 이강인을 향후 핵심 멤버로 본다는 확실한 증거다. 프리시즌 평가전에서도 입지 상승이 목격된다. 하비 그라시아 감독은 이강인의 다양한 역할 수행을 통해 팀의 최적 전술을 찾는 인상이다. 어린 선수들과 함께 뛴 레반테전에서는 이강인에게 주장 완장을 맡겨 화제를 끌었다. 최정예로 나섰던 2부 카르타헤나전에서 이강인은 2골 활약으로 팀의 3-1 역전승을 견인했다. 스페인 일간지 ‘아스(AS)’는 “19세밖에 되지 않았지만 발렌시아가 기다린 시간은 길었다. 이강인이 드디어 날아오를 준비를 마쳤다”라고 평가했다. 경기 후 이강인은 “내 골보다 선수단 분위기가 좋다는 사실이 더 중요하다. 좋은 시즌을 만들고 싶다”라며 희망을 표시했다.

최근 발렌시아는 공식 홈페이지를 통해 팬들에게 긴축운영 방침을 재확인했다. 구단은 코로나19 여파로 인한 수입 감소를 적시하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스타디움 신축, 스타 영입, 라리가 및 챔피언스리그 우승만 좇으면 어려웠던 과거를 되풀이할 뿐”이라고 강조했다. 앞으로 대형 영입을 기대하지 말라는 사전 통지다. 현지 팬들에겐 ‘싸우자는 소리’처럼 들린다. 하지만 3년을 기다린 이강인에게는 ‘이제 때가 되었다’라는 알람 소리다. 난세가 왔다. 영웅이 될 때다.

홍재민 축구평론가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 Copyright © Hankookilb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