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임 핑계로 인혁당 피해자 ‘빚고문’ 계속 하는 국정원

입력
2020.09.07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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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상금 11억 받았다가 판결 오류로 5억 반환해야
5억원에 이자 붙어 지금은 부채 14억으로 불어나
국정원, 전례 있음에도 법원 조정안도 수용 안 해

인민혁명당 재건위원회 사건 피해자들에 대한 국가의 ‘빚 고문’(본보 1월 11일 자 1, 13면 참조) 사태가 박지원 국가정보원장의 ‘진정한 배상’ 약속에도 불구하고 좀처럼 해결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법원이 제시한 손해배상금 관련 조정안마저 국정원이 "배임이 우려된다"는 이유로 거부하며 전향적 입장을 취하지 않고 있는 탓이다.

6일 법원에 따르면 서울고법 민사9부(부장 손철우)는 인혁당 재건위 사건 피해자 이창복(87)씨가 국가를 상대로 낸 청구이의 소송 항소심 선고 공판을 17일 열 예정이다. 이 소송은 국가에서 가지급받은 배상금 중 반환대상 금액을 납부하지 못하던 이씨 측이 “자택 강제경매 집행만은 중단해 달라”며 제기한 것으로, 피고 측 당사자는 국정원이다. 지난 6월 말 재판부가 조정안을 제시한 바 있으나, 국정원의 이의 신청으로 결국 성립되지 않았다.

용공조작 사건 피해자인 이씨가 또 다시 국가와의 싸움에 나선 건 2011년 대법원 판결에서 비롯됐다. 1974년 중앙정보부(현 국정원)에 끌려가 8년간 억울한 옥살이를 한 그는 2008년 재심 무죄 판결을 받았고, 이듬해엔 10억9,600만원의 손해배상금을 가지급받았다. 그런데 2년 뒤 대법원이 “과거사 사건의 배상금이 과다 책정됐다”며 돌연 34년치의 지연이자금(이자)을 삭제해 버린 것이다.

이씨는 4억9,600만원을 토해 내야 하는 상황이 됐다. 그러나 기존 채무 변제와 기부, 변호사 비용, 노년의 안식처(자택) 마련 등에 배상금을 써 당장 갚을 형편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2013년 박근혜 정부는 강제 환수에 나섰고, 국정원은 심지어 이씨 자택 강제경매까지 신청했다. 현재 이씨의 반환 대상 금액은 연 20%의 지연이자까지 붙으면서 14억원대로 불어, 가지급받은 배상금을 훌쩍 넘어섰다

현대사의 굴곡이 반영된 사안인 만큼, 이씨 소송을 맡은 1ㆍ2심 법원도 당사자 간 합의를 위해 중재에 힘쓴 것으로 전해졌다. 최근 항소심 재판부가 제시한 조정안은 △이씨의 반환 배상금 규모는 이자를 뺀 원금 4억9,600만원으로 감액하고 △이씨는 2,500만원을 먼저 납부한 뒤 향후 3년의 유예기간 동안 집을 매각해 나머지를 갚도록 하며 △국정원은 이씨 자택 경매 신청을 취하하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국정원은 “과다 지급분 환수를 포기하면 배임 행위가 될 수 있다”며 이를 거부했다.

그러나 법조계에서는 배임 논란 사건들의 선례를 볼 때, 법원 조정안 수용에 대해선 배임죄를 묻기 힘들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정연주 전 KBS 사장 사건이 대표적이다. 국세청과 2,000억원 규모의 법인세 취소소송을 벌이던 KBS는 2005년 법원 조정에 따라 556억원만 환급받고 소송을 취하했다. 검찰은 정 전 사장을 배임 혐의로 기소했으나, 1ㆍ2ㆍ3심 모두 무죄를 선고했다. ‘법원이 낸 조정 권고안에 응하는 형태라면, 어느 한쪽에 배임죄를 적용할 수 없다’는 이유였다.

또 2017년 법원의 강제조정안을 정부가 수용해 제주 강정마을에 대한 구상권을 철회한 것과 관련, 검찰이 배임 혐의로 고발된 이낙연 전 총리 등을 무혐의 처분한 것도 비슷한 경우다. 아울러 국가채권 관리법이 ‘모든 채무를 일시에 이행할 수 없는 채무자’에겐 채무 이행 기한 연장을 허용해 주고, 이행연기특약을 대신하는 ‘화해’ 규정도 담고 있는 만큼 배임 시비를 피할 수 있다는 견해도 있다.

결국 문제 해결을 위해선 국정원의 결단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다. 박지원 국정원장은 7월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2011년 대법원 판결에 대해 “대단히 잘못된 판결”이라며 “국가 공권력의 피해를 입은 사람에게 배상이 진정으로 이뤄지게 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다만 국정원 측은 “법원 조정 수용이 반드시 배임이 된다고 볼 수 없다는 의견도 있는 만큼, 법적인 해결 방안이 있는지 검토하겠다”는 원론적 입장만을 되풀이할 뿐, 가시적인 조치는 취하지 않고 있다. 부장판사 출신 변호사는 “배임 문제보다는 과거사 피해자에 대한 국가의 접근 방식이 핵심”이라며 “화해적 접근을 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최나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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