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3일 미국 대선이 두 달 앞으로 다가오면서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자국 우선주의ㆍ고립주의 행보가 한층 노골화하고 있다. 대중국 정책 등 필요할 때는 국제사회에 협조를 강권하다시피 하면서 입맛에 맞지 않는 국제기구에 대해선 제재나 지원 삭감 등을 무기로 ‘다자 협력’을 저해하는 이중적 면모가 도드라지고 있다.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은 2일(현지시간) 기자회견을 열고 미군 전쟁범죄를 조사 중인 국제형사재판소(ICC)의 고위 관리들을 제재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그는 “ICC가 불법적으로 미국인들을 관할권 아래 두려 한다”며 파투 벤수다 ICC 검사장과 파키소 모초초코 ICC 사법권 보상ㆍ협력 위원장의 미국 내 자산 동결 및 여행 금지 조치를 취하겠다고 공언했다. 앞서 6월 트럼프 대통령이 ICC 제재를 허용하는 행정명령에 서명해 법률적 근거도 구비된 상태다.
폼페이오 장관은 이날 ICC를 향해 “총체적으로 붕괴됐고 부패한 기관”이라고 맹비난했다. 덧붙여 제재 대상을 지원하는 개인ㆍ단체도 블랙리스트에 오를 수 있다고 위협했다. 이번 조치에는 미군 전범 의혹 조사에 관여한 ICC 직원들의 비자 발급을 제한하는 내용도 포함돼 파장이 작지 않을 전망이다. ICC 본부 소재지는 네덜란드 헤이그이나 유엔 본부가 미국 뉴욕에 있어 관계자들의 미 입국이 불허되면 활동에 상당한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다.
2002년 유엔 조약에 의거해 창설된 ICC는 현재 유일한 ‘국제 심판관’ 역할을 하고 있다. 국가 당국이 기소할 수 없거나 기소하지 않을 때 개입해 전쟁ㆍ반인륜 범죄에 책임이 있는 개인을 심리하고 법의 심판을 받게 했다. 한국을 비롯한 123개국이 참여하고 있지만 미국의 경우 해외 전장에 파견한 군인이 많아 “미군을 정치적 목적으로 기소할 가능성이 있다”며 지금껏 가입을 극구 거부하고 있다. ICC는 올해 3월 미군과 미 중앙정보국(CIA)을 포함한 아프가니스탄전쟁 당사자들의 전쟁포로 고문, 성폭행 등 전쟁범죄 의혹을 파헤치기 위해 처음 수사를 개시했다. 이를 진두지휘하는 인물이 바로 벤수다 검사장이다.
ICC와 인권단체는 즉각 반발했다. ICC는 이날 이례적으로 성명을 내고 “국제 사법기관과 구성원에 대한 강압적 행위는 전례 없는 조치”라며 “ICC 관할권을 인정하는 로마규정, 더 나아가 법치주의 자체를 심각하게 공격했다”고 지적했다. 국제인권단체 휴먼라이츠워치(HRW)의 발키스 자라 선임변호사도 “미 국무부가 인권침해를 처벌하기 위해 만들어진 제재의 본래 목적을 왜곡시켰다”고 비판했고,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 역시 대변인을 통해 심각한 우려를 표했다.
대선이 가까워질수록 트럼프 행정부와 국제기구간 불화는 심화하고 있다. 미 국무부는 이날 6,200만달러(약 736억원) 규모의 올해 세계보건기구(WHO) 분담금도 지불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전날 WHO가 주도하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백신 개발 및 배포 프로젝트 코백스(Covax)에 불참하겠다는 뜻을 밝힌 지 하루 만에 자금지원 중단을 선언한 것이다. 다만 지급 철회된 분담금은 다른 유엔 산하 기구에 돌아갈 예정이라고 덧붙였다. 폼페이오 장관은 비판여론을 의식한 듯 “미국은 다자기구가 실제로 기능하기를 원한다”면서 “한 데 모여서 떠들기만 하는 건 가치가 없다”고 말했다.
일련의 조치에 대해 발리 나스르 전 존스홉킨스대 국제관계대학원(SAIS) 학장은 미 일간 뉴욕타임스에 “국제기구는 트럼프 행정부의 도구로 활용할 수 있을 때만 유용하다는 태도”라며 “이대로 가면 미국과 오랜 기간 협력해온 국제기구들이 무력화되고 말 것”이라고 우려했다. 영국 일간 가디언도 “국제사회에서 고립을 택한 트럼프 행정부의 일방적이고 급격한 외교정책 중 하나”라고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