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린보다 치명적"... 나발니 독살 시도 '노비촉'은 무엇

입력
2020.09.03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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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장 멈추게 하는 고독성 신경작용제
옛 소련 개발... '러시아 배후설' 힘실어
러 정부 부인... 서방과 긴장 고조될 듯

독일 정부가 2일(현지시간) 러시아 야권 지도자 알렉사이 나발니가 의식불명에 빠진 원인으로 신경작용제 '노비촉'을 지목했다. 러시아 정부가 줄곧 부인해온 독살시도 의혹을 사실상 확인한 것이다. 나발니는 지난달 20일 러시아 국내선 항공기에서 갑자기 의식을 잃어 시베리아 옴스크병원에 입원했다가 이틀 뒤 베를린 샤리테병원으로 옮겨졌다. 독살 가능성에 더해 노비촉이 옛 소련이 개발한 독극물이라는 점에서 '러시아 배후설'을 놓고 서방국가들과 러시아 정부간 긴장도 한층 고조되고 있다.

냉전 때 소련서 개발... VXㆍ사린보다 독성 강해

노비촉은 냉전시대 끝무렵인 1980년대 소련에서 개발됐다. 지금도 러시아에서만 생산되는 것으로 알려졌고, 고도로 훈련을 받아야 다룰 수 있을 만큼 독성이 강한 화학물질이다. 때문에 노비촉이란 이름이 등장한 사실만으로도 나발니 독살 시도의 배후로 러시아 정부를 의심할 수밖에 없다.

노비촉은 심장을 멈추게 하는 근육경련을 유발하고 치명적인 근육 및 장기 손상을 초래한다. 노출된 양에 따라 30초 안에 빠르게 퍼지는데 피부를 통해 흡수될 수도 있어 위력이 상당하다. 미국 일간 뉴욕타임스는 "액체나 분말, 에어로졸(공기 중 미세입자)로 전달 가능한 노비촉은 VX나 사린보다 치명적"이라고 전했다. 2017년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형 김정남을 절명에 이르게 한 VX 신경작용제보다 5∼8배 강한 독성을 지닌 것으로 전해졌다.

베일에 싸였던 노비촉의 존재가 드러난 건 1990년대 소련 해체되면서다. 당시 화학무기 제조에 관여한 이들은 노비촉을 공개적으로 언급하기 시작했는데, 한 과학자는 1992년 러시아 매체에 "1987년 실수로 노비촉에 노출돼 회복 불능의 근육ㆍ장기 손상을 입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2년 전 이중간첩 독살 미수 사건으로 관심 집중

노비촉 공격이 의심된 첫 사례는 1995년 저명한 러시아 사업가 이반 키베리디 독살 사건이다. 당시 러시아 당국은 카드뮴 중독을 사망 원인으로 제시했으나 현지 매체들은 노비촉을 살해 수단으로 확신했다.

이후 대중의 관심에서 멀어졌던 노비촉은 2018년 영국에서 일어난 러시아 이중간첩 출신 세르게이 스크리팔과 딸 율리야 독살 미수 사건으로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이 사건을 계기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ㆍ나토)는 유엔 산하 화학무기금지기구(OPCW)에 노비촉 물량을 신고할 것을 러시아 정부에 공개적으로 요구했다. 끈질긴 문제제기 끝에 지난해 11월 노비촉 계열 물질은 화학무기로 공식 분류됐다.


러-서방 긴장 고조… 美 "진실규명 해야"

OPCW는 나발니 사건으로 다시 한번 러시아와 서방 간 전쟁터가 될 전망이다. 독일 정부는 노비촉 이슈를 OPCW에 회부해 국제 조사를 하겠다고 벼르고 있다. 미국과 영국도 이미 러시아를 압박하고 나섰다.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는 "증거가 지목한 사람이 러시아에 있는 누구라도 책임을 지도록 동맹국들이 협력해 악의적 활동에 대한 자금을 제한하겠다"는 성명을 냈고,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 역시 러시아 정부에 해명을 촉구했다.

러시아는 일단 진상 조사에 협력하겠다고 밝혔으나 독살은 여전히 인정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드미트리 페스코프 러시아 대통령궁 대변인은 "베를린 이송 전 나발니에 대해 국제기준에 따라 전면적인 건강 검진을 했을 때에는 독성 물질이 검출되지 않았다"고 재차 강조했다. 마리야 자하로바 러시아 외무부 대변인은 국영TV 방송 로시야1과의 인터뷰에서 "(서방 국가들이) 마치 사전 연습을 한 듯 마이크로 달려들었다"고 불편한 심기를 내비쳤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미국 등 여러 국가들이 러시아 반(反)체제 인사 공격에 대해 심각한 우려를 제기하고 있다"면서 "나발니 사건은 양측 간 긴장 수위를 더욱 높일 것"이라고 내다봤다.

진달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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