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은행 76억 '셀프대출'은 어떻게 가능했나… "회수 여부도 불투명"

입력
2020.09.04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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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책은행인 IBK기업은행 직원의 ‘셀프대출’ 파장이 커지고 있다. 직원이 76억원이란 거액 대출을 가족 앞으로 실행하면서도 감시망에 걸리지 않았던 것은 기업은행의 허술한 '내부자 거래 시스템' 때문이란 지적이 나온다. 기업은행은 뒤늦게 시스템 정비에 나섰지만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는 비판은 피하기 어렵게 됐다.

3일 금융권에 따르면, 기업은행 차장급 직원 A씨는 2016년 3월부터 올해 상반기까지 가족이 대표이사로 있는 법인기업 등에 29차례에 걸쳐 75억7,000만원어치 부동산 담보대출을 실행했다. 기업은행은 최근 A씨를 면직 처리했다.

업계에서는 일단 이 사건을 직원의 일탈 행위로 보고 있지만, 그 배경에는 기업은행의 허술한 대출 시스템이 있다는 게 공통된 관측이다.

통상 은행에서 대출을 실행하려면 담당 직원이 시스템에 주민등록번호를 입력하는 등 본인확인 절차를 거쳐야 한다. 현재 국내 주요 시중은행에서는 이 과정에서 주민등록 또는 연말 소득공제 등 인사정보상 가족으로 등록된 사람에게는 아예 대출 취급을 제한하고 있다. 시스템상 본인확인 단계를 넘어서지 못하는 것이다. 시중은행 관계자는 “대출 받는 사람이 여신승인 시스템에 대출을 올린 담당자의 가족으로 나타날 경우, 아예 시스템이 에러로 인식한다”며 “배우자, 부모, 배우자의 부모까지 사전에 차단되는 셈”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A씨는 대부분의 대출을 어머니 또는 아내 등 직계가족이 대표로 있는 법인 명의로 받았음에도 별다른 제재를 받지 않았다. 이는 그간 기업은행이 직원 본인 대출은 원천 차단하면서도, 가족 관련 대출은 제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예 관련 규정이 없는 것은 아니다. 기업은행 역시 이해상충 행위 금지 내규에 ‘업무를 이용해 가족과 친인척 등에게 이익을 주는 행위’를 금지하고 있다. 그러나 이를 시스템으로 막아두진 않으면서 이 같은 사건이 발생한 셈이다.

A씨는 느슨한 감시망을 악용해 대출을 승인한 뒤 자신이 직접 담보 등을 심사하고 가족 서명도 대필한 것으로 알려졌다. 기업은행 관계자는 "재발을 막기 위해 직원과 배우자 친인척에 대한 대출 취급을 원천 금지하는 규정과 시스템을 마련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기업은행은 또 대출금을 회수하는 한편, 업무상 배임과 금융실명제법 위반 등의 혐의로 형사 고발하는 방안도 검토 중이다. 하지만 이미 나간 대출금은 물론, 부동산 투자로 얻은 수십억원 차익까지 환수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금융권 관계자는 “시스템 허점을 노린 악의적 행동이긴 하지만, 대출 심사와 승인 과정에 절차상 문제가 있거나 은행에 금전적 손해를 입혔는 지는 별개 문제”라며 “불법이나 피해 사실을 입증하기엔 시일이 상당히 소요될 것”이라고 말했다.

허경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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