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석하고 이해하려 하기보단 영화 자체를 즐겼으면 좋겠습니다. 영화는 일단 즐겁고 흥미진진해야죠. 스릴 넘치는 놀이기구를 탄 것처럼요. 시간이라는 개념, 복잡한 서사는 흥미진진함을 증대시키기 위한 장치일 뿐입니다.”
최근 이메일로 만난 영화 ‘테넷’의 크리스토퍼 놀런(50) 감독은 영화가 다소 까다롭다는 얘기에 이런 대답을 내놨다. "영화 자체를 충분히 즐기되 그 뒤 좀 더 생각해볼 부분이 생긴다면 그건 보너스 아니겠느냐"고도 했다.
지난달 26일 개봉한 ‘테넷’은 코로나19를 뚫고 올 여름 선보인 유일한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다. 거기다 감독의 전작이 1,000만 관객을 모은 ‘인터스텔라’를 비롯, ‘다크 나이트’ 시리즈, ‘인셉션’ 등이다. 개봉 전 관객들의 기대감은 하늘을 찔렀다. 뚜껑을 열어보니 반응은 엇갈린다. '역시 놀런!'이라는 사람도 있지만 대체적으로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다" 쪽으로 많이 기운다.
‘테넷’은 시간이 역행해서 흐르는 ‘인버전’을 통해 현재와 과거를 오가며 세상을 파괴하려는 무기판매업자 사토르(케네스 브래너), 그리고 사토르에 맞서는 비밀조직 테넷 요원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엔트로피를 반전시키면 시간이 거꾸로 흐르도록 할 수 있다는 이론을 바탕으로, 순행하는 시간과 역행하는 시간을 하나의 화면 안에서 구현해낸다. 이 때문인지 ‘테넷’은 '시간을 가지고 노는 감독'이라는 놀런 감독의 영화 중에서도 가장 어렵다는 평을 받는다.
놀런 감독도 이런 반응을 예상한 모양이다. “영화 속에 ‘이해하려 하지 말고 느끼라’는 대사를 넣은 것"도 그 때문이라 했다. 동시에, 그렇기에 '테넷'을 두고 “내 영화 중 가장 야심 찬 작품이자 큰 작품”이라 강조했다.
‘메멘토’에서 '인터스텔라'에 이르기까지, 놀런 감독은 ‘시간의 상대성’을 꾸준히 다뤄왔다. “일상 속에서 우리는 시간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지만, 생각해보면 시간은 추상적이고 복잡한 개념이라 설명하기도 이해하기도 어려워요." 그래서 시간을 비틀면 독특한 상상력이 나올 수 밖에 없다.
'테넷'은 그 가운데 20여년 전부터 가지고 있었던 '시간 구부리기' 아이디어를 영화화한 것이다. ‘테넷’은 순행하는 시간 속의 사물과 역행하는 시간 속의 사물을 교차해서 보여주다 두 시간대를 구부려서 만나게 한다. “모든 영화에는 시간을 관객에게 묘사하는 메커니즘이 있죠. 다만 그걸 철저히 숨기고 있을 뿐이죠. 그걸 드러내보이면 어떨까, 그 아이디어에 흥미를 느낀 거죠." 2014년부터 본격적으로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다.
그래서 '테넷'의 영화적 하이라이트는 순행하는 시간과 역행하는 시간의 공존, 그리고 두 시간대에 속한 인물들 간 액션들이다. 순행하는 시간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과 역으로 움직이는 사람이 뒤엉켜 몸싸움을 벌이고, 각자의 시간대에 속한 차량들이 추격전을 벌인다. 이걸 어떻게 찍고 편집했을까. “어떤 장면에선 카메라를 거꾸로 돌리기도 하고요, 다르 장면에선 배우가 시간의 역순으로 움직이는 연기를 하기도 했고요, 정말 다양한 기법을 다 썼습니다." 표정과 동작과 동선의 연속성 문제를 두고 정말 많은 고민을 했다.
이런 어려움은 놀런 감독이 컴퓨터그래픽 대신 '아날로그 액션'을 고집하면서 더 가중됐다. 비행기와 격납고가 충돌하는 장면에서 실제 보잉 747 비행기를 동원했고, 영화 막바지 ‘시간 협공’ 장면에선 100만여㎡의 대규모 세트까지 지었다. "그 장면은 편집하기에도 가장 어려웠어요. 다른 방향으로 가는 두 개 장면을 하나의 지점에서 만나게 해야 했는데, 우리로서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한참을 고민하고 연구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영화 자체의 물리적 시간과도 싸워야 했다. 놀런 감독도 선선히 인정했다. 편집 과정에서 2시간 30분 분량으로 끊기 위해 적잖게 끙끙댔다. 스스로도 “분명 더 긴 러닝타임의 영화에 맞는 분량이긴 했다”고 말했다.
‘테넷’은 속편이 있을 것처럼 끝난다. 구상해둔 게 있을까. 놀런 감독은 “한 번에 한 편씩 작업하는 편이라 ‘테넷’이 어느 정도 관객을 만난 뒤에야 다음 프로젝트에 대해 생각하게 될 것 같다"고만 말했다. 속편은 몰라도 코로나19로 끝내 무산된 한국 방문만큼은 꼭 약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