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수(選數)가 깡패’라는 말은 국회에서 오랜 시간 회자돼 왔다. 정치권의 연공서열 문화를 꼬집은 말이다.
3선 이상 의원을 통상 '중진'이라 부른다. 국회의장ㆍ부의장은 물론이고 국회의 꽃이라는 상임위ㆍ특위 위원장 중진 의원들의 몫이다. 상대적으로 몸이 편해 의원들이 선호하는 상임위원 자리도 중진에게 먼저 돌아간다. 의원들은 서로를 '동료'보다는 선ㆍ후배 관계로 본다. 선수가 올라갈 수록 '어른' 대접하는 것이 여의도 관례다.
그러나 선수와 생산성은 비례하지 않는다. 의원 1인당 국회 회의 참석률과 법안 발의 건수는 선수가 올라갈 수록 뚝뚝 떨어지는 게 일반적이다. '깡패'라는 말에는 폼만 재는 다선 의원에 대한 은근한 멸시의 의미도 없지 않다.
21대 국회의 화두로 떠오른 '국회의원 4선 연임 금지법'은 선수가 깡패가 되지 않도록, 아예 4선 의원 등장을 원천 차단하는 내용이다. 3선까지만 하고 국회를 깔끔하게 떠나라는 취지다. 그러나 선수 제한이 능사일까. 4선 의원이 사라지기만 하면 '일하는 상생의 국회'가 될까. 논란이 뜨겁다.
“정치가 국민의 신뢰를 얻지 못하고, 심지어 조롱의 대상이 되는 상황에서 국회의원 스스로 ‘기득권 내려놓기’를 통해 국민의 신뢰를 회복 할 필요가 있다.” 지난달 국회의원 4선 연임 금지법안을 대표 발의한 윤건영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밝힌 취지다. 국민의힘(옛 미래통합당)이 정강정책에 담으려 했다가 당내 반발에 부딪혀 무산된 '4선 연임 제한 조항'도 같은 내용이었다.
4선 연임 제한의 목적은 ‘일하는 국회’를 만들겠다는 것이다. 4선 이상 의원을 떠나보내는 대신, 더 많은 정치 신인을 발굴해 국회를 쇄신하자는 뜻이다. 중진 의원들이 의정활동 평가를 보면 고개가 끄덕여지기도 한다. 20대 국회의 의원 1인당 법안 대표 발의 평균 건수를 보면, 초선 의원은 61.6개, 재선 80.6개, 3선 47.8개, 4선 43.2개였다. 국회 회의 평균 결석률도 4선 의원(9.4%)이 가장 높았다.
문재완 한국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국회의원 임기 제한에 관한 연구’ 논문에서 “다선 의원은 국회에서 심의 또는 숙의하는 과정보다 당내 헤게모니 장악이나 지역구 관리에 더 신경을 쓴다. 의원 임기 제한으로 공직 순환근무가 실현되면 국민과 소통할 수 있는 사람이 대표가 될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고 썼다.
윤건영 의원실 관계자도 “중진 의원이 되면 상임위 활동보다는 본인의 정치적 진로를 염두에 두는 경우가 많은 건 사실”이라면서 “4선이면 16년인데, 그 동안 권력을 누리는 게 국민 눈높이에서 적절하지 않다는 판단”이라고 말했다.
여론은 이 같은 주장에 동의한다. 지난달 MBC 의뢰로 코리아리서치인터내셔널이 진행한 여론조사 결과, 4연임 금지에 찬성하는 응답자(64%)가 반대 답변(30.3%)보다 많았다.
그러나 부작용에 대한 우려도 만만치 않다. 법안을 낸 윤건영 의원이 “4선 연임 제한법은 극약 처방이자 비상 조치”라고 부를 정도다.
우선 중진 의원들의 정치 경험과 입법 전문성이 대번에 사장된다. 모든 중진 의원이 '청산 대상'은 아니다. 민주주의 선진국에서도 '의원 다선 제한법'은 찾아보기 어렵다. 미국 낸시 펠로시 하원의장의 정치 경력은 33년이다. 미국은 15개 주에서 주의회 의원 임기를 제한하고 있지만, 연방의회 의원 임기는 제한하고 있지 않다.
'3선'이라는 기준은 지방자치단체장의 임기를 3선까지 제한한 것에서 따왔다. 기계적 '1대 1 대입'은 무리라는 지적이 많다. 광역시의회 의장 출신인 초선 이형석 민주당 의원은 한국일보와 통화에서 “지자체장은 예산권ㆍ인사권을 갖고 있기 때문에 제왕적 권력을 막기 위해 3선 이상을 금지하는 것”이라며 "의원은 다르다"고 했다. 그는 “국가 행정력을 견제하고, 관료 민주주의를 깨기 위해서라도 국회엔 경험 많은 의원들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사회정치적 비용 문제도 있다. 이준한 인천대 교수는 “보통 국회의원 한명과 그의 보좌진을 공부 시키는 데 1년에 10억원이 들어간다며 "의원이 경험을 쌓아 전문성을 발휘할 시기에 임기를 제한하면 국가 예산을 비효율적으로 쓰는 것”이라고 우려했다.
국회의원이 의정활동을 열심히 하고 특권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취지에 공감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인위적인 임기 제한'이 유일한 방도는 아니다. 정당별로 의원 평가 시스템을 철저하게 운용하고, 총선 공천 과정에서 실적을 검증하는 것이 대안으로 제시된다. '대충 일하다 3선까지 하고 떠나는' 의원들을 양산하기보다 '열심히 일해서 4선, 5선까지 살아 남는' 의원들을 지키는 것이 생산적이기 때문이다.
임기 제한이 오히려 국민들의 정치 혐오감을 부추길 뿐이라는 반론도 있다. 이준한 교수는 “국회라는 국가기관에 대한 신뢰와 대표성을 느끼는 국민들이 가뜩이나 적은데, 제도가 이런 현상을 더 부추길 수 있다”면서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4선 의원을 바라보는 3선 의원 당사자들이 앞장서 반대하는 것은 '노이즈'가 될 가능성이 있다. 3선인 박대출 국민의힘 의원은 당내에서 거론된 4선 연임 제한 방안에 대해 “당의 소중한 자산을 훼손하고 대여 투쟁의 전투력 약화를 초래하는 자해행위”라고 비판했다. 같은 당 3선 김태흠 의원도 “4선 연임 규정은 과유불급”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