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35주년이네요. 데뷔하고 나서 10년, 15년 20년이 될 때만 해도 음악을 하는 게 직장 다니듯 생활의 일부 같았어요. 그런데 어느 시점이 되니 큰 무게로 다가오더군요. 의무감도 생기고 조금의 압박감도 있고 복잡한 느낌이 들어요.”
가수 주현미(59)가 올해로 데뷔 35주년을 맞았다. 1985년 ‘비 내리는 영동교’로 화려하게 데뷔한 그는 ‘신사동 그 사람’ ‘눈물의 부르스’ ‘짝사랑’ ‘잠깐만’ 등 숱한 히트곡을 남기며 오랜 시간 대중과 함께한 ‘국민가수’다.
최근 서울 중구 한국일보 본사에서 만난 그는 “10여년 전만 해도 음악을 하고 싶지 않으면 언제든 그만둘 수 있을지 알았지만, 시간이 더 지나면서 내 노래에 즐거워하고 위로 받고 감동 받는 팬들의 마음을 점점 의식하게 됐다”고 했다. “전성기 시절 빽빽한 일정을 소화하며 눈앞에 있는 숙제를 마치기 급급했을 땐 미처 몰랐던 무게와 의미를 느끼게 됐어요. 뒤늦게 철이 든 거죠. 굳이 연령층을 따지자면 중장년층의 고달픔이나 지나온 삶을 대변해주는 가수라고 할 수 있을까요. 이젠 그런 사실을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아요.”
중학생 시절 아버지의 지인이었던 작곡가 정종택과 냈던 기념음반부터 계산하면 그의 음악 인생은 44년에 이른다. 중앙대 약학대 재학 시절엔 교내 밴드 '진생라딕스'의 보컬로 1981년 제2회 강변축제(이듬해 '강변가요제' 변경)에서 장려상을 받기도 했다. 대학 졸업 후엔 평범하게 서울 필동에서 약국을 운영했다. 하지만 그의 재능을 아까워 한 작곡가 정종택의 권유로 가수 조미미 대신 메들리 앨범 ‘쌍쌍파티’를 녹음했는데, 이게 그만 엄청난 히트를 기록하면서 이듬해 정식 데뷔했다. 사실상 평생을 음악과 함께한 셈이다.
35년의 가수 인생 가운데 ‘화양연화’는 언제였을까. 뜻밖에도 그는 육아를 위해 음악 활동을 잠시 멈췄던 1993년 이후 10년을 꼽았다. “한창 활동할 때는 현충일 하루 빼곤 매일 노래했어요. 하루만에 강원도, 경상도, 충청도를 누비고 다니며 노래한 적도 있었죠. 그때만 해도 가수들 주무대가 밤업소다 보니 새벽에 일이 끝나는 일이 다반사였어요. 매일이 긴장의 연속이었죠. 그런 생활을 10년 넘게 하다 보니 지치더군요. 아이들에게 미안하기도 했고요. 그래서 청계산 자락으로 이사해서 꽃도 키우고 나물도 캐며 살았어요. 과거로 돌아가라면 그때로 돌아가고 싶을 만큼 아이들과 함께 지냈던 시간이 행복했어요.”
트로트가 다시 인기를 끌면서 주현미는 전성기만큼이나 바쁜 일정을 보내고 있다. SBS ‘트롯신이 떴다’에 고정 출연 중이다. 그리고 2010년부터 6년간 진행했었던 라디오 프로그램 KBS ‘주현미의 러브레터’를 4년 만에 다시 맡아 라디오 DJ로도 활동하고 있다. 특히 ‘트롯신이 떴다’에선 트로트 창법을 지우고 부른 ‘어느 멋진 날’ ‘Shallow’ ‘눈 코 입’ 등이 화제를 일으키며 젊은 층에게도 폭넓은 사랑을 받고 있다. 그는 “곡 배정을 받으면 2주간 매일 들으며 곡을 익히다 사흘 정도 연습하는데 자기학대를 하고 나서 뭔가를 이뤄내면 정말 기분이 좋다”고 했다.
최근 트로트 열풍에 대해선 긍정적인 측면도 다소 회의적인 측면도 있다고 했다. 트로트 장르에 대한 편견이 일부 사라지면서 재평가 받는 부분도 있지만 요즘의 인기가 일시적 현상이고 유행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최근 트로트 인기가 기회이기도 하고 다른 장르와 동등한 비중으로 자리잡는 과정일 것”이라면서도 “썰물처럼 유행이 지나가면 옥석이 가려질 것이다. 사실 너무 소비적인 경향이 있는 것 같기도 하다”고 지적했다.
주현미는 인기 유튜버이기도 하다. 2018년 말 시작한 ‘주현미TV’에서 그는 1926년 윤심덕의 ‘사의 찬미’에서 2018년 자신의 곡 ‘여정’에 이르기까지 한국 가요 대표곡을 한 주에 한두 곡씩 부르고 있다. 곡에 대한 아무런 언급도 없이 기타와 아코디언 연주에 맞춰 담백하게 가창만 하는데 그 맛에 구독 버튼을 누른 사람만 벌써 11만명이다.
소리소문 없이 시작해 2년 가까이 이어오는 동안 140여곡이 쌓였는데, 그 사이 누적 조회수는 3,000만건에 이른다. “선배님들이 남긴 주옥 같은 노래가 사라져가는 것 같아 가슴이 아프고 급박한 느낌까지 들었어요. 다른 가수들에게 교과서처럼 남았으면 하는 마음도 있죠. 후배 가수가 제 영상을 보고 배운 노래가 있다는 말을 듣기도 했는데 그때는 정말 뿌듯하더라고요. 처음엔 구독자가 100명, 200명 넘는 것도 신기했는데 벌써 10만명이 넘었어요. 10년간 1,000곡을 채우는 게 목표입니다.”
지난 5월에는 주현미TV에서 부른 50곡에 얽힌 사연을 책으로 엮어 ‘추억으로 가는 당신’을 출간했다. ‘주현미 밴드’ 음악감독이자 주현미TV에서 기타를 연주하는 이반석씨가 글을 도왔다. ‘소양강처녀’의 주인공이 가수 지망생이었던 작곡가 모임 사무실 사무원이었다는 이야기, ‘처녀뱃사공’이 전쟁 중 전사한 오빠를 대신해 나그네들을 싣고 낙동강을 건너던 소녀에 관한 노래라는 설명과 함께 주현미 자신의 이야기도 담았다.
데뷔 35주년을 맞아 20번째 앨범도 준비 중이다. ‘여인의 눈물’을 시작으로 디지털 싱글 형태로 한 달에 두 곡씩 발표하고 있는데 12곡 중 절반을 공개했다. 준비 중이던 35주년 기념 공연은 코로나19로 기약 없이 연기 상태다.
주현미의 노래가 이처럼 오래도록 인기를 끌 수 있었던 요인은 무엇일까. MBC 예능 PD 출신인 주철환 아주대 문화콘텐츠학교 교수는 그의 노래가 ‘한’의 노래도 아니고 ‘흥’의 노래도 아닌 ‘정’의 노래여서 많은 이들과 소통하고 교감한다고 분석했다. 주현미는 여기에 더해 자신의 노래에 담긴 중심 정서는 ‘순정’, “소박하고 때묻지 않은 순수한 정”이라고 했다.
예순을 코앞에 둔 주현미의 초승달 미소는 20대 시절과 변함 없이 보는 이를 기분 좋게 한다. “4, 5년 전부터 철학 강의를 들었어요. 인생이 뭔지, 뭘 위해서 살아야 하는지 모두들 의문을 품잖아요. 수많은 현인들도 결국 답을 찾지 못한 채 눈을 감은 걸 보면, 답은 없으니 순간을 행복하게 살라는 게 아닐까 싶어요. 그렇게 나이를 먹어가는 거 같아요. 제겐 음악이 함께 늙어가는, 고마운 친구 같아요. 팬들에게 오래도록 힘을 주고 위로를 주는 가수로 남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