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 사각지대 메우는 헌재의 ‘불기소 취소’ 심판

입력
2020.08.24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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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헌법재판소의 '검찰권 견제' 기능“
檢결론 못믿겠다”… 설립 이후 1만4,000여건 접수
재정신청 확대 불구, 법원 못가 헌재 찾는 발길 여전


편집자주

영화나 드라마를 통해 간간이 조명될 뿐 일반인들이 접근하기는 여전히 어려운 법조계. 철저히 베일에 싸인 그들만의 세상에는 속설과 관행도 무성합니다. ‘법조캐슬’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한국일보>가 격주 월요일마다 그 이면을 뒤집어 보여 드립니다.

A씨는 지난 2016년 회식을 마치고 귀가하던 중 믿었던 직장 동료 B씨에게 성폭행을 당했다. 그는 날이 밝자마자 친구와 상담한 뒤, 성폭력피해자지원센터와 경찰에 신고했다. 병원에서 받은 성폭행 피해 검사 결과도 제출했다. 사건 당일부터 계속된 B씨의 사과 문자 메시지도 있었다. 그러나 검찰의 결론은 무혐의였다. “(A씨의) 사귀자는 제안에 (B씨가) 답변을 보류하자, 앙심을 품고 신고한 것”이라는 B씨 주장이 더 합리적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진짜 문제는 다음부터였다. 검찰이나 법원을 상대로 불복절차를 밟고 싶었지만, 불가능했다. 성폭행 피해를 신고만 했을 뿐, 고소하진 않은 상태에서 사건이 종결돼 항고나 재정신청 대상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결국 A씨가 기댄 곳은 헌법재판소였다. 사건을 심리한 헌재는 “검찰이 중대한 수사 미진과 자의적 검찰권 행사로 청구인의 평등권과 재판절차 진술권을 침해했다”며 불기소처분을 취소했다.


헌재의 '검찰권 견제' 역할...재정신청 확대로 급감

헌재는 헌법에 관한 분쟁을 담당하는 헌법상 독립 기관이다. 낙태죄 폐지나 양심적 병역거부 등 우리 생활과 밀접하면서도 사회ㆍ문화ㆍ종교적 이견이 첨예한 이슈들도 대부분 헌재를 통해 일단락된다. 헌법에 반할 정도로 심각한 기본권 침해가 발생했음에도 달리 구제할 방법이 없다면, 기본적으로 헌재의 심판 대상이 된다는 얘기다. 그런데 헌재의 업무 가운데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면서도 잘 알려지지 않은 기능이 하나 있다. 바로 검찰권 견제다.

헌재는 출범 이듬해인 1989년 4월 “검사의 자의적인 수사 또는 판단에 의해 불기소처분이 이뤄진 경우에는 헌법에 정해진 기본권을 침해하게 된다”고 결정한 이래, 불기소처분 취소 소송을 담당해 왔다. 설립 이후부터 올해 6월까지 헌재에 접수된 불기소처분 관련 사건은 총 1만4,681건으로, 전체 사건 수(4만118건)의 3분의 1이 넘는다. 현행 재정신청(검사의 불기소처분에 불복해 법원에 그 당부를 가려달라고 신청하는 것) 제도가 마련되기 전인 2007년까지만 따지면, 불기소처분 관련 사건 비중은 약 58%에 달했다. ‘헌재 업무의 대부분은 검찰권 견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던 셈이다. 물론 법원에 내는 재정신청 제도가 있긴 했지만, 그 대상 범죄가 공무원의 직권남용죄 등 일부에 국한됐었던 관계로 검찰 처분의 정당성을 외부 기관에 물을 수 있는 수단은 헌법소원이 사실상 유일했다.

때문에 헌재에는 검찰의 불기소처분에 불복하는 고소ㆍ고발인의 심판 청구가 줄을 이었다. 전두환ㆍ노태우 전 대통령을 비롯한 12ㆍ12 군사쿠데타 관련자에 대한 불기소처분, 5ㆍ18 광주민주화운동 가해자들에 대한 불기소처분 등이 모두 헌재의 심판대에 올랐다. 일반 국민들도 권위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처럼 보이는 검찰보다는, 1987년 ‘6월 항쟁’의 결과로 태어난 헌재에 자신의 사건을 묻고 싶어했다. 헌법상 ‘재판 받을 권리’를 주장하며 가해자 처벌을 호소했던 것이다. 예컨대 2006년의 경우, 한 해 동안 헌재에 접수된 불기소처분 사건 비중은 전체의 70.9%(1,209건)에 달할 정도였다.

이런 현상은 2007년 형사소송법 개정으로 재정신청의 대상이 모든 범죄로 확대되면서 완화됐다. 재정신청이라는 또 다른 구제 절차가 생기면서, 대부분의 불기소처분은 헌법소원 대상에서 제외된 것이다. 헌법재판소법은 ‘공권력의 행사 또는 불행사로 인해 헌법상 기본권을 침해 받은 경우’를 심판하도록 하면서도 ‘법원의 재판’과 ‘다른 법률에 구제절차가 있는 경우’는 예외로 정하고 있다. 그 결과, 2009년 이후 20%대로 떨어진 불기소처분 사건의 비율은 2015년엔 13.7%(256건)까지 뚝 떨어졌다.




불복 절차 '사각지대'는 아직도 남아 있어

재정신청 대상 범죄의 확대에도 불구, 마땅한 불복 수단이 없는 ‘사각지대’는 여전히 존재한다. 범죄의 피해 당사자가 고소 절차를 밟지 않는 경우가 대표적이다. 이들은 항고는 물론, 재정신청조차 할 수 없다. 형사소송법상 재정신청의 주체가 고소인 등으로 한정돼 있는 탓이다. 범죄 피해 신고를 하고 수사기관에 피해자 진술까지 하더라도, 고소사건이 아닌 ‘인지사건’으로 분류되면 재정신청이 불가능하다는 의미다.

현행법상 이런 경우는 수사 기관이나 법원을 통해서 불복절차를 밟을 수 없으므로, 헌재가 해당 사건을 맡게 된다. 전체 접수 건수는 파악되지 않았으나, 지난 5년간 헌재 결정으로 불기소처분이 취소된 사건 중 8건은 청구인이 피해자나 사건 관계인인데도 ‘고소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불복 절차를 밟지 못한 사례였다. 이 사건들 중 절반은 성범죄 사건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친척에게 성폭행을 당했다거나, 학교 친구에게 성추행을 당한 사건도 있었다. 자신을 드러내길 꺼리는 피해자들이 불복 절차에서마저 ‘법적 소외’를 당하고 있는 셈이다.

피의자가 청구하는 기소유예 처분 취소 심판도 헌재가 담당한다. 피의자 역시 항고나 재정신청의 주체가 될 수 없어서다. 기소유예는 법률적으로 혐의는 인정되나, 연령이나 범행 경위 등 다른 사정들을 감안해 불기소처분을 내리는 것이다. 이를 선처로 여기고 반기는 경우가 있긴 하지만, 반대로 무죄 주장을 고수하는 피의자들은 “차라리 재판을 받게 해 달라”면서 헌법소원을 내기도 한다.

지난 10여년간 헌재에서 인용 결정이 났던 불기소처분 취소 사건의 대부분은 실제로 이와 같이 기소유예 처분을 취소해 달라고 요구한 경우였다. 2008년 이후 헌재가 인용한 불기소처분 관련 사건들 중 기소유예 취소 사건의 비율은 94.1%(419건)에 이른다. 올해에도 44건(6월 기준)의 기소유예 처분이 헌재에 의해 취소됐다.

최동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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