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리게 달려도 괜찮은 미래에서 온 SF

입력
2020.08.21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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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선란 SF소설 '천개의 파랑'

지난달 숨진 영국 역사가 클라이브 폰팅은 역작 ‘녹색 세계사’에서 인류 역사를 '자연 환경을 향한 인간의 도전'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을 거부한다. 그는 대신 환경과 인간의 상호작용 관점에서 역사를 바라봐야 한다고 말한다. 폰팅의 질문은 이것이다. “우리가 누리는 모든 것은 지속 가능한 것일까.” 자연과의 공존에 대한 고민이 없다면 인간의 미래도 없으리라는 그의 진단은, 오늘날 전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이상기후 현상과 지구의 신음을 통해 하나둘 증명되고 있다.


천선란 작가의 장편 ‘천개의 파랑’은, 이처럼 인간만을 서사의 중심에 두는 것이 아니라 다른 생명과 함께 생각할 때 비로소 인간의 미래가 그려진다는 것을 보여주는 SF소설이다. 안락사가 확정된 경주마와 폐기를 앞둔 휴머노이드, 그리고 이들을 돌보는 주변 인물들을 통해 동물과 로봇, 그리고 인간의 종을 넘어선 교감과 연대를 그린다. 얼마 전 출간된 소설집 ‘어떤 물질의 사랑’에 이어 한국 SF문학을 이끌어갈 중요한 이름으로 눈도장을 찍은 작가의 역량을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다. 제4회 한국과학문학상 장편 대상 수상작이기도 하다.

소설의 배경은 인간보다 가볍고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운 휴머노이드가 경마 경기의 기수로 대체된 2035년이다. 경주마 ‘투데이’의 파트너로 낙점된 휴머노이드 기수 ‘콜리’에게 연구원의 실수로 인지와 학습 능력이 들어간 칩이 삽입된다. 콜리는 다른 휴머노이드 기수라면 궁금해하지 않았을 것들을 궁금해한다. 투데이가 달리는 것을 즐거워하는지가 궁금하고, 투데이의 목덜미를 쓸고 갈기를 만져보며 교감을 시도한다. 이같은 콜리의 행동은 투데이를 더 빨리 달릴 수 있게 만들지만 인간들의 만족은 끝이 없다. 결국 채찍질 끝에 계속 빨리 달리기를 요구받던 투데이는 연골이 다 닳아 뛸 수 없게 된다.


콜리는 투데이가 다리를 완전히 잃는 것을 막기 위해 경기에서 스스로 낙마를 선택한다. ‘쓸모 없음’으로 분류돼 폐기처분 될 위기에 처한 콜리와 투데이 앞에 로봇 연구에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소녀 연재가 등장하고, 이들은 회복과 스스로의 가치를 스스로 증명해내는 여정을 함께 꾸려간다.

“인간이 필요로 하지 않으면 죽는” 것이 “이 행성의 동물들의 위치”다. 소설은 그러나 ‘쓸모’와 ‘필요’를 존재가치의 기준으로 삼는 인간의 시각이 과연 합당한지 묻는다. 휴머노이드와 동물뿐만이 아니다. 휠체어를 타는 연재의 언니 은혜, 불의의 사고로 얼굴에 흉터가 생기면서 배우의 꿈을 등져야 했던 연재의 엄마 보경처럼, ‘흠결’은 지우고 최고의 상태만를 보편으로 두는 인간 세계에서는 ‘누락’된 것들이 설 자리는 없다.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으로 그들을 배제시키는 방식으로 인간사회는 유지돼 왔다.

그러나 흠결을 ‘극복’해서 다시 달릴 수 있게 되는 게 아니라, 흠결 있는 존재로도 충분히 함께 살아나갈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 인간이 해야 할 역할이고 그것이 미래가 되어야 한다고 작가는 소설 속 인물들의 입을 통해 역설한다. 은혜는 이렇게 말한다. “다리를 고치고 싶다는 건 아냐. 물론 고치게 된다면 좋겠지. 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는다고 해서 불행하지 않아. 꼭 같을 필요는 없잖아. 그렇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으니까”


투데이는 다시 예전처럼 빨리 달릴 수 없고 콜리는 또 한번 낙마하게 된다. 하지만 느리게 달리면 쓸모 없다고 폐기처분 되는 것이 아니라, 느리게 달려도 충분히 괜찮은 미래에서 이들은 충분히 행복하다. 그리하여 기술의 발전이 ‘더 빠르고’ ‘더 완벽한’ 미래가 아니라 부서지고 상처입고 약한 존재들을 품는 미래를 가져올 수도 있으리라는 희망을, 독자는 이 소설로 하여금 품어볼 수 있게 된다.

표지에 적힌 작가의 프로필은 이런 말로 시작한다. “동식물이 주류가 되고 인간이 비주류가 되는 지구를 꿈꾼다. 작가적 상상력이 무엇인지에 대해 늘 고민했지만, 언제나 지구의 마지막을 생각했고 우주 어딘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꿈꿨다.” 작가가 꾸는 꿈이, 우리 모두의 꿈이 되기를, 그리하여 그게 정말로 지구의 미래가 되기를 꿈꿔본다.


한소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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