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덩샤오핑을 소환하다

입력
2020.08.18 06:00
27면


8월 22일은 중국 개혁개방의 총설계사로 불리는 덩샤오핑의 탄생 116주년 기념일이다. 중국인들은 덩샤오핑을 개혁개방의 신시대를 연 사람이며, 이른바 중국특색사회주의 길을 건설하기 위해 분투한 자이며, 덩샤오핑 이론을 만든 창시자이고 실사구시의 실용적인 정신 소유자로 기억한다. 그는 생전 유언대로 자신의 무덤을 만들지 않아서 직접 무덤을 찾아 참배할 수 없다. 때가 되면 돌아오는 기념일에 관련 뉴스를 보고 듣는 것 외에는 인민들이 달리 그에게 애도와 존경의 마음을 표현할 방법이 없다. 그가 사망한 지 23년이 지났다. 덩샤오핑의 공과 사는 분명히 존재한다. 공은 개혁개방의 길을 열고, 인민의 생활 수준을 높이고, 홍콩의 귀속을 완성한 것이다. 과는 당의 영도를 중시하는 권위주의 체제 심화와 천안문사건의 원죄라고 할 수 있다.

덩샤오핑의 성과 가운데 미국과 수교를 통한 대외관계의 안정도 빼놓을 수 없다. 덩샤오핑은 1978년 5월 베이징을 방문한 미국 국가안보 보좌관 브레진스키를 만나 1979년 1월 1일 역사적인 미국과 공식 외교관계 수립의 기초를 놓은 사람이다. 그러나 미중수교 40여년이 지난 지금 덩샤오핑의 바람대로 미중관계가 흘러가지 않고 있다. 상호 윈윈하는 협력의 관계가 아니라 상호 대립과 갈등의 관계로 변화하고 있다. 미국은 미래에 다가올 위협으로 중국을 보고 있고, 중국은 지금 자신을 억누르는 세력으로 미국을 보고 있다. 미국에 중국은 미래 위협이고, 중국에게 미국은 현재의 위협이다. 이러한 갈등 관계는 물론 덩샤오핑이 희망한 관계는 아니다. 중국과 홍콩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1983년 6월 25일 덩샤오핑은 인민대회당에서 홍콩 전국인민대표대회 대표와 정협위원 등과 면담했다. 당시 덩샤오핑은 대표단에 “홍콩 귀속 이후 자본주의는 얼마나 계속될 것인가?”라고 물었다. 답이 없자 그는 그 자리에서 홍콩의 자본주의는 본토에 귀속되는 날부터 50년 동안 변하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밝혔다. 당시 덩샤오핑의 판단은 홍콩 문제에 관한 중국과 영국의 합의 과정에서도 불구하고 많은 홍콩 사람이 귀속 후 홍콩이 변할 것이라는 두려움에 기초했다. 중국의 최고 지도자로서 확실한 방향성을 제시할 필요가 있다는 인식에 근거한 판단이었다. 그는 홍콩 문제 해결의 열쇠로 국제사회에 ‘일국양제’를 제시했다. ‘일국양제’를 홍콩의 역사와 현실을 충분히 반영하는 전략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즉, 홍콩의 출발은 식민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역사가 하나요, 자본주의 방식으로 성장했다는 번영의 결과를 수용하는 그의 인식과 태도, 자세의 결과이다.

덩샤오핑의 과오는 역사 인식의 변화를 필요로 하는 정치적 문제지만 국제 환경의 변화와 그에 대한 인식은 현실적인 문제이다. 덩샤오핑은 국내 발전을 위한 우호적인 국제 환경의 조성 차원에서 미국 문제를 다뤘다. 그리고 식민의 역사 종식 차원에서 홍콩 문제를 처리했다. 그러나 그의 의도와 달리 미국 문제와 홍콩 문제가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현재 중국을 향하고 있다. 미국은 연일 대중국 공세를 강화하고 있고, 홍콩에서도 보안법 파동이 계속되고 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중국 일부에서지만 덩샤오핑의 ‘도광양회’가 다시 회자되고, ‘고도자치’가 주목받고 있다. 중국으로서는 다소 불편할 수 있으나 회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양갑용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책임연구위원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 Copyright © Hankookilb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