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쉰 중반이 된 우리 세대는 자랄 무렵 달리 먹을 게 많지 않았다. '도나스(도넛)'도 엄마가 튀겨주고, 찐빵도 만들어 먹던 시절이었다. 그럴듯한 요식업이 전국 구석구석에 다 있을 리 없었고, 돈도 없었다. 아버지들이 점심값을 아끼려고 누런 도시락 봉투를 들고 다니던 시절이었다.
그래도 짜장면만큼은 지금과 견주어보면 그때가 최고였다. 중화요리업을 독점하던 화교들 사이에서 경쟁이 심화되었고, 면 단위 이하의 시골이나 도시 변두리에도 중국집이 들어섰다. 먹이를 놓고 서식지가 확대되는 건 모든 생물이 비슷하게 겪는 모양이다. 당시 어른들은 여전히 '청요리'라고들 불렀지만, 소략하게 배워서 경쟁 심하지 않은 작은 마을에 들어선 중국집에 대단한 요리가 있을 리 없었다. 있더라도 사먹을 사람도 별로 없었을 것이다. 당시 요리라는 건 시간이 필요했다. '선배들 어깨너머로 국자에 맞아가며' 배운다던 시절이었으니까. 몇 가지 면과 밥 요리, 만두, 탕수육 정도 챙겨서 개업하곤 했으리라.
이젠 그 많던 화교 중국집들이 거개 사라졌다. 연구자들은 몇 가지 이유를 든다. 우리 정부의 화교 탄압책이었다. 이건 화교뿐만 아니라 외국인에게 다 해당되는 것이었는데 부동산을 비롯한 부를 축적하는 데 규제가 심했다. 대양주의 나라들과 미국, 캐나다 등에서 이민자를 활발히 모으는 바람에 그리들 많이도 떠나간 탓도 있었다. 외식업계에서는 '고깃집'이라는 강력한 한국형 대항마가 등장해서 손님을 쓸어가고 있었고, 같은 중국요리업에도 본격적으로 한국인들이 짓쳐들어오곤 했던 시기였다. 시장을 기술로 독점하던 시기가 지나가고 있었던 셈이다.
어쨌든 우리 세대는 그런 변화하던 중국요리를 또렷하게 겪었다. 짜장면만 놓고도 변화사를 줄줄 읊을 수 있다. 우선 시대가 변해가면서 장(소스)의 양이 많아졌다. 캐러멜 들어간 대량 공급된 장에 전분을 많이 넣어 그릇 가득 덮어주는 건 1980년대 이후의 스타일이다. 그 무렵만 해도 여전히 '화상(華商) 중국집'들은 누렇고 갈색을 띠는 담근 된장을 쓰는 집들이 꽤 있었다. 장도 짭짤하게 볶아서 단맛이 크지 않았다. 그런 장을 국수 위에 얹는 듯 마는 듯했다. 양파가 지천으로 나오기 전이라 화상들의 고향 산둥성 방식대로 대파가 반찬으로 나오곤 했다.
요즘 이런 면을 일부러 찾는 사람들이 생기고, 뿌리를 찾으려는 화상 요리사들의 노력에다가, 마케팅 바람도 부는 듯하다. 이른바 진짜 옛날 짜장면이고, 백년짜장면이라는 말이 붙는다. 백년짜장면이란 화교가 한반도에 도래하여 요리업을 펼치기 시작한 긴 시간을 얼추 계산한 시간이다. 인천에도 몇몇 집이 그런 짜장면을 팔고 있는데, 춘천에서도 한 집을 봤다. 회영루라고, 춘천 사람들은 다 아는 노포 중국집이다. 기스면도, 울면도 파는 반가운 집이다. 메뉴에 문자 그대로 백년짜장면이 있다. 고기를 짠 중국된장에 볶아서 노란색을 띤다. 양파와 설탕, 캐러멜 장을 쓰지 않으니 단맛도 아주 약하다. 신기하게도 이 짜장면의 주력 손님은 젊은이들이란다. 요즘 시대의 옛날 것, 복고에 대한 궁금증이 짜장면에도 밀려든 셈이다. 면은 손으로 친 옛날 것이 아니었지만, 달지 않은 이 역사적인 짜장면을 한 그릇 먹다보니 그래도 중국집이 다 저물어가는 것은 아니구나 했다. 백년을 더 갈지는 모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