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와 싸워도 '위안부'는 모르는 미국인을 위해 썼어요"

입력
2020.08.13 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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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우리 종족의 특별한 잔인함' 낸 에밀리 정민 윤


“소녀들이 도착했고 아팠고 임신했고 수많은 주사약을/맞았고 이름없는 짐승들이/우리를 깔아뭉갠 채 폭발했고/(…)/38선까지 내내 혈혈단신으로 걸었다/미군들이 내게 DDT를 너무 많이 뿌렸고/이가 전부 떨어져 나갔지/12월 2일이었다/나는 자궁을 잃었고/이제 일흔이다.” (시 ‘황금주’ 가운데 일부)

1922년 충남 부여에서 태어난 황금주는 스무 살 일본 군수공장에서 돈 벌게 해준다는 말에 속아 위안부가 됐다. 1992년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유엔인권소위원회에서 자신의 참담한 경험을 폭로했고 2013년 눈 감았다.

1991년 한국에서 태어나 2002년 캐나다로 이주한 에밀리 정민 윤은 자신의 영어가 완벽한 문장의 산문보다는 다소 유연한 시에 더 잘 어울린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황금주의 증언은 그런 에밀리 정민 윤의 영어와 만나 시가 됐다.

에밀리 정민 윤의 시집 ‘우리 종족의 특별한 잔인함’은 위안부 피해자로부터 오늘날 미국의 아시아계 여성까지, 기나긴 억압과 폭력의 역사를 그린다. 2018년 미국 대형 출판사 하퍼콜린스에서출간됐고, 워싱턴포스트로부터 "마음을 사로잡은 데뷔작"이란 극찬을 받았다. 최근 소설가 한유주를 통해 다시 우리말로 번역됐다.



한국어판 출간 기념으로 13일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윤 시인은 “훼손되고 삭제된 우리의 이야기를 어떻게 다시 살려낼 수 있을지 고민한 끝에 태어난 시”라고 소개했다. 책 출간에 맞춰 내한했으나 자가격리 지침으로 이날 간담회는 화상으로 진행됐다.

윤 시인은 펜실베니아 대학에서 영문학과 커뮤니케이션을, 뉴욕 대학에서 문예창작을 전공했다. 대학 시절 논문을 쓰다 미국이 일본과 맞서 싸웠음에도 정작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는 점을 깨닫고 시를 쓰기로 결심했다. 윤 시인은 “과연 내가 이 목소리를 재현할 자격이 있는지 오래 고민했지만 한국어와 영어를 알고, 위안부 역사에 대해 알고, 시를 쓰는 내가 아니라면 그 누가 이 이야기의 생명을 연장할 수 있겠냐는 미국 친구들 말에 용기를 얻어 쓰게 됐다”고 말했다.



시집의 원제는 ‘A Cruelty Special to Our Species’다. 직역하자면 ‘우리 종족에게 특별한 잔인함’이 더 정확하지만 ‘우리 종족의 특별한 잔인함’으로 제목을 달았다. 민족주의적 접근을 넘어 넓은 의미의 인간 종족의 잔인함에 대해 얘기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고발’ ‘증언’ ‘고백’ ‘사후’ 네 개의 장, 서른 다섯 편의 시로 구성된 책은 위안부의 개인의 고통에서 전세계 여성들의 보편적 고통까지 폭넓게 담았다. 특히 ‘가해자’ 한국이 베트남과 필리핀 여성들에게 저지른 폭력, 미국 내 소수자인 아시아 이주 여성에 대한 차별도 등장한다.

“위안부 피해자의 경험을 중심에 두되, 인간이 저지르는 전쟁의 잔혹함과 폭력성, 그 과정에서 여성이 겪는 트라우마에 대해 폭넓게 얘기하고 싶었습니다. 전쟁 폭력과 여성에 대한 폭력은 결국 모두 하나로 이어져 있다는 걸 말하고 싶었습니다.”

한소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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