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를 구하기 위해 기사가 무너지는 성 안으로 뛰어든다. 잽싸게 몸을 날리는 그 순간, 별안간 푸른빛이 몸을 감싸더니 손 끝부터 '점'으로 변해간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실제 사람처럼 유려하고 입체적이던 캐릭터가 딱 머리와 몸통, 2등신 도트 캐릭터로 바뀐다. 기사는 좌절한다. “내가 도트라니...” 도트 캐릭터라 흘리는 눈물마저 머리만한 크기다.
카카오게임즈가 지난달 공개한 탐험형 모바일 역할수행게임(RPG) '가디언테일즈'의 홍보 영상이다. 가디언테일즈뿐만 아니다. 넥슨이 지난달 내놓은 모바일 다중역할수행게임(MMORPG) '바람의 나라:연' 역시 도트 그래픽으로 중무장했다. 두 게임 모두 199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큰 인기를 누린 컴퓨터(PC)게임을 모바일로 재출시한 것이다.
최근 문화계에 불어닥친 뉴트로(New+Retro) 열풍 속에, 그때 그 시절 '저사양'의 상징이었던 도트 그래픽이 스마트폰에서 부활했다. 부활 정도가 아니라 제2의 전성기다. 당장 '바람의 나라:연'과 '가디언 테일즈'만 해도 출시 5일만에 각각 애플 앱스토어 매출 순위 1위와 4위에 올랐다.
도트 게임의 인기는 복고열풍 덕이 크다. 모바일 시대를 맞아 예전에 인기 있었던 1,2세대 PC게임들이 스마트폰에서 부활한 것이다. ‘리니지M’시리즈, ‘피파 모바일’, ‘라그나로크 오리진’, ‘카트라이더 러쉬플러스’ 등이 대표적이다. 이 게임들은 PC게임 원작을 잘 계승했다는 호평을 받았다.
도트 게임은 여기서 한걸음 더 나간다. 복고 게임이라 해도 기술 발달 덕에 이제는 캐릭터의 피부색, 눈동자 색, 눈썹 모양까지도 다 설정할 수 있다. 하지만 도트 게임은 일부러 이를 거부한다. 예전 PC게임 시절의 투박한 느낌을 유지하려 든다.
도트 게임은 저사양 기술이니까 훨씬 만들기 쉽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업계에서는 정반대라고 한다. 현재 게임계의 주류 기술이 2D일러스트나 3D렌더링 방식이다보니 막상 도트를 일일이 찍어 그래픽을 만들어내야 할 숙련된 기술자를 구하기 어렵다는 얘기가 나온다. 한 게임업계 관계자는 “3D그래픽이 다수인 국내 모바일 게임 시장에서 도트 게임은 오히려 더욱 어려운 도전”이라고 말했다.
도트 게임 열풍은 근본적으로 우리나라 컴퓨터 게임 세대가 두터워진 덕분이다. PC게임을 즐겼던 청소년들이 지금은 구매력 있는 3040세대가 됐고, 이제 막 게임을 접하기 시작한 1020세대는 도트 게임이 새로운 감수성으로 다가온다.
초등학생 시절 하루 다섯 시간씩 ‘바람의 나라’ PC게임을 즐겼다는 직장인 김모(27)씨는 ‘바람의 나라’ 모바일 게임 출시 소식을 듣고 꼬박 1년을 손꼽아 기다렸다. 김씨는 “아무 생각 없이 게임을 즐길 수 있던 그 시절 추억을 다시금 느낄 수 있어 좋다”고 도트 게임의 매력을 설명했다. 가디언테일즈를 즐겨 하는 정재윤(28)씨도 “플레이 화면을 록맨(1987년 출시된 패밀리 컴퓨터 게임) 시리즈처럼 꾸며놔서 그렇게 오래된 게임이 아닌데도 옛 추억을 되새기게 된다”고 말했다.
1020세대인 김가영(13)양은 “지나치게 고화질이어서 오래 하면 눈이 아픈 요즘 게임과 달리 도트 게임은 눈도 편안하고 어지럽지도 않다”고 말했다. 이준수(18)군은 “오히려 조작이 간편하고 게임이 쉬워서 순위를 올리고픈 경쟁심을 자극한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