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적 기준치보다 소음도가 낮은데 굳이 방음벽을 설치하는 이유를 모르겠어요.”
지난해 3월 경기 고양시의 신축 아파트에 입주한 박모(45)씨는 아파트 주변에 설치된 방음벽을 둘러보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시청에서 입주세대 중 한 곳을 찾아가 주간 소음도를 측정했더니, 기준보다 낮은 58.9데시벨(㏈A)이 나왔다”며 “그런데도 시청에선 시공사와의 사전합의를 이유로 내세우며 방음벽 설치를 강행했다”고 말했다. 환경정책기본법상 주간과 야간의 소음 기준치는 각각 65㏈A과 55㏈A이다.
박씨의 말처럼 이 아파트의 방음벽 설치는 시공사가 시청으로부터 준공허가를 받는 조건 중 하나였다. 아파트 인근에 위치한 킨텍스 하역장에서 발생하는 소음으로 주민들 민원이 발생할 것을 우려한 시청에서 선제적으로 시공사에 방음벽 설치를 요구한 것이다. 박씨는 “상식적으로 소음도를 먼저 측정한 후에 방음벽이 필요할 때 이를 설치하는 게 순서 아니냐”며 “비슷한 문제의식을 가진 500여세대 주민들로부터 방음벽 설치 반대의견을 모아 시의회에 제출하는 등 꾸준히 목소리를 냈지만 허사였다”고 설명했다. 당시 설치 반대에 동참한 주민은 전체 입주세대(1,054세대) 중 절반에 달했다.
현재 이 아파트 앞에는 높이 11.2m의 방음벽 설치가 완료됐다. 기준치보다 낮은 소음도에도 불구하고 방음벽을 설치한 이유에 대해, 고양시 측은 “킨텍스 하역장이 주간에만 운영되는 게 아니기 때문에 방음벽 설치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고 설명했지만, 정작 야간 소음도는 측정하지 않았다.
고양시 아파트 주민들이 방음벽 설치에 반대한 이유는 △저층 세대 조망권 침해 △빛 반사 등으로 인한 실내 온도상승 등이었다. 전문가들도 비슷한 이유를 들어 방음벽 설치의 폐해를 지적하고 있다. 정일록 한국환경피해예방협회 고문은 “방음벽은 조망권 침해, 여름철 내부 온도상승 등의 문제뿐 아니라 도시미관을 해치고 바람길을 막아 통풍을 어렵게 하는 등의 문제도 수반한다”고 지적했다.
이처럼 주민들의 불만과 전문가들의 지적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선 소음피해 예방책으로 방음벽 설치를 선호하고 있다. 지난해 8월 환경부가 발표한 ‘2018년 소음진동 관리시책’에 따르면 지난해까지 전국 시도 내에 설치된 방음벽 길이는 1,721㎞에 달했다. 한국도로공사에 따르면 전국 방음벽 중 고속도로에 설치된 방음벽 길이만 해도 1,087㎞로 나타났다. 지역도로, 간선도로 구분 없이 소음방지책으로 방음벽 설치가 우선적으로 검토되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방음벽의 실효성 여부다. 정일록 고문은 “방음벽은 주변 여건에 따라 효과가 좌우되는데, 통상 5층 이하 건물은 방음벽으로 인한 소음저감 효과가 5~15㏈A로 기대되지만, 10층 이상 건물이 대부분인 한국에선 소음 경로가 다양해서 방음벽 저감 효과가 떨어질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방음벽의 한계를 극복하고 보완하기 위한 대책은 학계와 여러 연구기관에서 꾸준히 제시돼왔다. 가장 대표적인 기술이 저소음 포장도로다. 국토교통부가 2014년 발표한 ‘방음시설물의 효과적 설치에 의한 소음저감 대책 연구보고서’에 따르면 저소음포장을 시공한 서울외곽순환도로 김포 영업소 일대 도로는 일반 콘트리트 포장도로에 비해 6.3~9.1㏈A의 소음 저감 효과가 나타났다. 특히 저소음 포장도로는 높이에 상관없이 모든 층에 같은 효과가 미치기 때문에 유럽에선 가장 효율적인 소음저감 대책으로 인식되고 있다.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가 2017년 발표한 ‘미래보고서: 소음저감대책’ 보고서에 따르면 공극률(도로 내 아스팔트에서 빈틈이 차지하는 비율로, 이 비율이 높을수록 소음 흡수에 용이) 18% 이상의 저소음 포장도로를 시공하면 최소 6㏈A의 소음을 줄이는 것으로 나타났다. 보고서는 “저소음포장은 도로 인근에 거주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효과가 있기 때문에 소음을 줄이기 위한 최적의 해결책”이라고 평가했다.
비용 대비 효율성 측면에서도 저소음 포장도로가 방음벽보다 낫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한국소음진동공학회가 2011년 발표한 ‘방음벽 및 저소음 포장에 대한 비용ㆍ편익 분석’ 보고서에 따르면 1㎡ 당 1㏈A을 낮추는 데 들어가는 금액이 방음벽의 경우 1,044만5,000원인 반면에, 저소음포장은 720만7,000원으로 나타났다. 도로교통공사가 공개한 1m당 설치비용 역시 방음벽은 높이(5~15m)에 따라 229만~1,357만원이 들지만, 저소음 포장도로는 4차로 기준 150만원 정도였다.
이처럼 저소음 포장도로의 효과가 드러나고 있는데도 국내 도로는 여전히 방음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김상훈 미래통합당 의원실이 도로공사로부터 받은 자료에 따르면 올해 2월 기준 전국 고속도로에 설치된 저소음 포장도로를 1차로로 환산할 경우 총길이는 205㎞로 집계됐다. 전국 고속도로에 설치된 방음벽 길이의 5분의 1 수준에 불과하다. 김성태 전 미래통합당 의원은 2017년 국정감사에서 “서울~세종 고속도로의 성남~안성 구간 50.1㎞(왕복 6차로) 중 38㎞(램프 포함)에 방음벽이 설치된다. 방음벽이 필요 없는 터널 구간을 제외하면 왕복 66.5㎞ 구간의 절반(57%) 이상에 방음벽이 세워지는 것”이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방음벽 우선 정책'은 심각한 예산 소모를 불러오기도 한다. 이채익 미래통합당 의원실에 따르면 지난 10년간 방음벽 설치에 투입된 예산은 6,074억원에 달했다.
다만 저소음 포장도로도 내구성이 떨어지는 단점이 있다. 도로공사 측도 이런 점 때문에 선뜻 ‘저소음포장 우선 정책’으로 선회하지 못하고 있다. 도로공사 관계자는 “2005년 저소음 포장도로를 처음 적용했는데, 최초에는 소음저감효과가 9㏈A로 나타났다가 차츰 감소하기 시작해 7년 후에는 3㏈A이하로 떨어졌다”며 “시간이 지나면 재포장을 해야 할 수도 있어 현재로선 가성비 측면에서 (반영구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방음벽 설치를 더 선호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최근엔 도로소음 피해를 줄이기 위한 대책으로 방음벽과 저소음포장을 동시에 도입해 각각의 단점을 보완하려는 시도가 늘고 있다. 최근 경기도 화성동탄지구 택지사업(방음벽 높이 9~13mㆍ방음벽 및 저소음 포장 길이 3.2㎞), 광교신도시(높이 4~16mㆍ길이 2.6㎞), 위례신도시(높이 2~18mㆍ길이 3.5㎞) 등에 이 같은 공법이 적용됐다. 하지만 '방음벽+저소음포장'의 경우 방음벽만 설치했을 경우와 비교해 소음저감효과가 미미하다는 지적도 있어, 만족할 만한 효과를 낼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결국 ‘방음벽 공화국’이라는 오명을 벗기 위해선 저소음 포장도로의 기술력이 좀더 향상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적지 않다. 업계에선 이와 관련해 민간기업들이 도로공사보다 뛰어난 기술력을 보유하고 있는데도, 도로공사가 ‘자사 기술력 몰아주기’ 등을 이유로 외면하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업계 관계자는 “도로공사의 저소음포장 공법인 ‘Q-pave’ 방식에 비해 민간기업이 개발한 ‘RSBS 복층포장’ 기술의 소음저감효과가 6~4㏈A 이상 더 높은데도 도로공사 측은 자사 기술만을 고집하고 있다”고 전했다.
도로공사 측은 이에 대해 “Q-pave 공법은 최초 시공 이후 상당히 시간이 흘러, 장기간에 걸친 소음저감효과가 데이터로 구축됐다”며 “민간기술 역시 검증기간이 지나고 그에 상응하는 저감효과가 나타난다면 언제든지 현장에 도입할 계획”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