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 내 미투 해보니... “제도가 없나? 인식이 없지!”

입력
2020.07.16 18:30
[인터뷰] 직장 성폭력 신고 체험기 ‘우리에게는 참지 않을...’ 낸 유새빛 씨



“직장 내 성폭력 피해자가 겪을 최악의 상황이라고 생각했어요. (가해자가) 죽음으로써 문제를 회피해 버린거잖아요. 피해자가 사과를 받기는커녕, 피해사실 자체를 조사하기도 쉽지 않죠.”

직장인 유새빛(가명ㆍ28)씨는 고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성폭력 의혹 사건을 보고 4년 전 ‘그날’을 떠올렸다. 어렵게 취직한 대기업에서 성희롱을 당하고, 고민 끝에 회사에 성폭력을 신고한 후 가해자인 최 차장이 ‘사과’를 하고 싶다며 한밤 중 유씨에게 전화를 걸어온 날을. 유씨는 ‘미투 이후 100일’ 간의 경험을 지난 해 독립출판물로 펴냈고, 다시 내용을 다듬어 최근 책 ‘우리에게는 참지 않을 권리가 있다’(21세기북스)로 출간했다.

15일 전화로 만난 유씨는 “(직장 내 성폭력을 겪고 보니) 관련 보호제도가 있지만, 사람들의 인식이 부족했다. 제가 겪은 일을 사람들과 나눠 인식을 바꾸고 싶었다”고 말했다.

여성친화 기업에서 당한 네차례 성폭력

2017년 유씨가 들어간 회사는 상사 눈치 보지 않고 육아휴직을 쓸 수 있어 ‘여성친화적’이고 ‘혁신적인’ 이미지를 가진 대기업이었다. 유씨는 연수원에서 성폭력예방교육을 받을 때만 해도 “당하면 신고하는 분위기”가 조성된 줄 알았지만 막상 첫 근무처에서부터 크고 작은 성희롱을 경험하게 된다. 상사들은 사내 직원과 유씨의 염문설을 내고, 유씨의 손을 쥔 채 업무를 설명하고, 회식자리에서는 허벅지에 손을 얹기도 한다. “그 자리에서 문제제기 하지 못한 게 자책이 돼” 악몽을 꾸다 근무처를 옮기게 되고 그곳에서 문제의 ‘최 차장’을 만나게 된다.

‘유새빛 씨는 우리 회사의 꽃이에요. 이런 걸로 미투하지 마시고요.’ 새롭게 배치된 조직에서의 첫 회식 자리. 옆 팀 최 차장은 이런 말을 던진 후, 옆자리에 앉아 유씨의 허리와 팔 안쪽을 만지고 어깨동무를 했다. 사내 성희롱 예방교육 기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하늘이 무너진 것 같은 충격에 눈물이 나왔고, 주변에 왜 우는지를 설명하면서 최 차장의 성희롱은 자연스럽게 ‘공론화’ 됐다.

“저는 성폭력 피해를 입증하는데 어려움은 없었어요. 이전 허벅지 만진 경우를 문제 삼았다면 본 사람도 없고 시간이 지나 가해자도 저도 기억이 흐려졌을 테니 상황이 달랐겠죠. 첫 회식자리에서 발생한 사건이라 ‘꽃뱀’ ‘연애’ 프레임도 피할 수 있었고요. 많은 미투 경험자들이 겪은 2차 가해를 피할 수 있었던 겁니다.”

공론화 이후 최 차장은 사과했고, 유씨는 “이런 일이 반복돼선 안 된다는 생각에” 절차대로 사내 성폭력 신고를 감행했다.


절차대로 처리하면 피해자가 상처받아

피해자 스스로 “합리적으로 진행된 잘 처리된 케이스”라고 평가하지만, 신고 후 일상을 회복하는 일은 녹록지 않았다. 심의위원회가 열리기까지 회사는 최 차장을 유씨와 ‘분리’ 시키기 위해 근무장소를 옮기게 하면서도, ‘네가 겪은 일은 아무것도 아니다’ ‘왜 그렇게 예민하냐’ ‘그분이 그럴 분이 아니다’라는 식의 조직원들의 반응에는 속수무책이었다. 유 씨는 가해자를 감싸는 주변인의 말들이 2차 가해나 다름없었다고 말했다.

“성폭력 신고 후 관련 절차를 밟았을 때 회사 측에서도 해결 노력은 있는데, 미흡한 부분이 많더라고요. 신고가 적어서 담당자들한테도 이 업무가 낯선 거예요. 회사규모가 작은 편이 아닌데도 이정도면 더 작은 회사에서는 성폭력 신고 처리 경험이 더 없을테고, 신고해도 제대로 해결되지 않으니 피해자들이 신고 안 하는 악순환이 반복되는 거죠.”

심의위원회가 열리기 전 문제의 ‘그날’, 늦은 시각 전화를 건 최 차장은 “너무 답답해 (유씨) 집근처에 왔다가 한강변으로 가는 중”이라며 일방적으로 사과했다. 유씨는 그때 심정을 “공포스러웠다”고 말했다. “가해자가 제 집을 안다는 게 무서웠고, 한강변이라고 하니까 그 사람이 극단적인 선택을 할까봐 두려웠습니다. 만약 그렇게 되면 제가 얼마나 큰 짐을 지게 될지, 너무 무서웠어요.”

박원순 전 시장의 성폭력 신고가 접수됐다는 사실을 들었을 때, 그날의 전화가 떠올랐다는 유씨는 “법과 제도만으로 성폭력 피해자를 보호하는 건 한계가 있다”고 강조했다.

성폭력 피해 ... 유형별 대처 사례 모아야

회사는 성폭력 피해사실을 인정했고, 가해자 최 차장은 정직 1개월에 인사이동 징계를 받았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유 씨도 부서를 이동했다. 최 차장의 징계로 그가 속한 부서에 업무가 늘면서 주변의 눈치를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미투를 계기로 퇴근 후 노동법을 공부하게 됐다는 유씨는 “직장 내에서 벌어졌던 사례들을 데이터화해 법과 제도로 지키지 못하는 피해자의 인권을 세심하게 살피자”고 제안했다. 예컨대 ‘그분이 그럴 분이 아니다’ 같은 2차 가해성 발언을 사례별로 모아 직장 내에서 금지하거나, 직장 상사나 인사부서 등을 통하지 않고 곧바로 성폭력신고가 가능하도록 조직 내 ‘핫라인’을 개설하는 등이다.

“관련법을 공부할수록 제도의 공백을 메우는 것보다, 사람들의 인식을 바꿔야 한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당연한 문제를 제기하는 피해자를 유별나다고 평가할 게 아니라, 그 사람 입장에서 이해할 수 있는 문화가 필요해요. (직장내 성폭력을) 신고하고 맞서 싸운, 분들께 용기 내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이윤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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