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부부 간에 일어나는 가정 폭력 사건은 공식적으로 제로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지. 상습적인 남편의 폭력을 견디다 못해 쉼터를 찾는 아내들은 엄연히 실재하는데, 이 범죄는 세상에 드러나지 않는 기막힌 일이 벌어지고 있다. 친족에 대한 범죄 통계는 산출되지만 ‘부부’라는 세부화된 코드를 만들어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수정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교수는 지난 4월 펴낸 ‘이수정 이다혜의 범죄영화 프로파일’(민음사)에서 “존속이나 비속은 통계를 내고 있지만, 남편의 부속물, 소유물로만 취급해온 아내는 아예 항목에 없다"고 분개했다. 정확한 통계가 없으니 예방이나 지원책을 마련하는 건 더 힘들어진다.
여성들은 범죄 통계에서만 제외되는 게 아니다. 남성에 의해, 남성을 위해 설계된 세상에서 여성은 남성보다 더 가난해지고, 더 아프고, 더 쉽게 죽는다. 영국의 여성운동가이자 저널리스트인 캐럴라인 크리아도 페레스는 이 만연한 여성 차별의 근원을 젠더 데이터 공백에서 찾는다. '보이지 않는 여자들'은 여성을 누락시키고 은폐한 세상을 향한 고발장이다. 책의 미덕은 이 같은 주장을 검증된 공식 수치와 통계로 증명해냈다는 거다. 1,330여개나 달린 자료 출처는 ‘젠더 팩트풀니스’를 입증하는 증거자료다.
여성에게 세계는 그 자체로 기울어진 운동장이다. 책은 기술 의료 노동 경제 정치 재난 도시계획 등 16개 분야를 짚어가며 여성을 둘러싼 일상생활의 거의 모든 것들, 여성들조차 인식하지 못하고 지나쳤던 보이지 않는 차별과 폭력을 깨알 같이 고발한다.
왜 여성은 유독 스마트폰을 자주 떨어트리는 걸까. 여름철 사무실의 에어컨 바람이 여성들에게 더 춥게 느껴지는 건 왜일까. 똑같이 자동차 사고를 당해도, 여성이 남성보다 더 크게 다치거나 많이 죽는 것도 이상하다. 저자는 모든 문제가 남자를 표준으로 삼았기 때문이라 말한다.
요새 스마트폰은 크기로 경쟁한다. 평균 액정 크기는 6인치. 제조업체들은 '한 손 조작'이 가능하다고 우기지만 여성들의 평균 손 크기(18㎝)를 감안하면 남성만 소비자로 본 거다. 여성에게 실내가 더 춥게 느껴지는 것도 냉방 표준 설정 온도가 몸무게 70kg, 40세 남성의 기초대사율 기준으로만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자동차 충돌 실험 설계 역시 177㎝, 76㎏ 남성 신체 사이즈 위주다. 여성이 남성보다 중상을 입을 확률이 47%나 높은 건, 여성이 신체적으로 약해서도 혹은 운이 없어서도 아녔다.
저자는 평생 일하고도 인정 받지 못하는 여성들의 무급 노동 문제도 정면으로 겨눈다. 전 세계적으로 여성은 무급 노동의 75%를 담당한다. 집안일부터 아이 양육, 부모 돌봄 등. 여성의 일일 무급노동시간은 3~6시간. 반면 남성은 평균 30분~2시간이 고작이다. 애당초 출발선부터 다른 것. 돌봄 대상이 없는 남성은 회사에 전력투구를 할 수 있지만, 여성은 남성과 똑같은 시간을 회사에서 일하고도 집에선 또 다른 노동이 시작된다. 여성이 회사를 남성보다 오래 다니지 못하고 시간 조절이 용이한 파트 타임 일자리를 전전하는 건, 의지가 부족하거나 무능해서가 아니라 남성보다 더 길게, 그리고 많이 일하고 있어서다. 하지만 국가와 사회는 '보이지 않는 노동'을 제대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이 모든 해결책은 데이터공백을 메우는 일이다. 당장 ‘역차별’이라고 들고 일어나는 남성들의 반발이 들리는 듯 하다. 저자는 반박이나 비난 대신 설득을 택한다. 데이터 공백은 남성들이 일부러 악의적으로 만든 게 아니다. 그저 여성들을 생각하지 않은 '무념'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몰랐다면 이제라도 고치면 될 일이다. 이건 정의의 문제를 넘어 경제적 이득을 높이는 길이기도 하다. 당장 여성의 무급 노동을 국가가 담당하고, 여성이 유급 노동에 더 많이 투입될 수 있다면 경제성장률은 올라갈 것이란 게 저자의 단언이다.
그러기 위해선 여성들이 모든 분야의 의사결정과정에 참여해야 한다. 저자는 정치권에 여성쿼터제를 적용해 여성 의원 진출을 높이는 걸 해법으로 제시한다. 적어도 여성이라면 여성들을 잊지 않을 것이란 기대를 품고서다. 책은 여성과 남성 모두에게 당부한다. “세계를 다시 설계하려거든 세계의 절반인 여성에게 먼저 물어봐라.” 가치 판단 없는 인공지능과 알고리즘으로 돌아가는 앞으로의 세계에서, 왜곡된 데이터공백을 바로 잡지 못하면 여성은 영원히 투명인간으로 살아가야 할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