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중에 질러도 되는 비명은 없다

입력
2020.07.16 04:30
26면

편집자주

36.5℃는 한국일보 중견 기자들이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게, 사람의 온기로 써 내려가는 세상 이야기입니다.

죽음을 예삿일로 여기는 사람은 없다. 특히 황망한 사별은 숙연한 마음을 부른다. 고인이 숨을 스스로 끊은 경우라면 대개의 남은 자들은 그가 겪었을 고통의 위력에 압도된다. 평소 희생과 선의로 상징되던 인물이라면 더하다. 어느 모로 보나 박원순 서울시장의 죽음은 그 자체로 침묵, 당혹, 판단 유보를 자아내는 일이었다.

고인을 둘러싼 성범죄 의혹에도 우선 추모와 애도의 언사만이 쏟아지는 모습들을, 많은 이들이 착잡함 속에서도 전혀 이해 못할 바로 여기지 않은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었을 테다. 다만 그 와중에서도 고개를 반대로 돌려, 이미 터져 나온 비명을 삼키고 있는 피해자의 안부에 애가 타는 이와 그렇지 않은 이가 있었을 뿐.

이렇게 추모와 진실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심정적 외줄타기를 하던 이들의 애도하는 마음에 모래를 끼얹은 것은 아이러니하게 고인을 가장 아끼던 정치적 동지들이었다. “예의를 갖추라”는 여권의 입단속이 여과 없이 전파를 타는 순간, 내가 아는 한 이 세계의 절반쯤은 추모 대신 분노의 마음으로 들끓기 시작했다.

피해자의 진실규명 요구에 어떻게 답할 것이냐는 물음에 여권이 보인 태도는 일관됐다. 지금은 아니다. 예의가 아니다. 유가족이 아파하고 있지 않느냐. 우리가 아파하고 있지 않느냐. 죽음의 크기가 압도적이지 않느냐. 그럴 사람이 아니다. 사자(死者) 명예 훼손을 하지 마라. 죽음으로 미투 처리의 전범(典範)을 실천했다. 이미 대가를 치렀다. 비판에는 정치적 의도가 있다. 등등.

모순으로 범벅이 된 이들 언사를 관통하는 메시지는 ‘침묵하라’ 였다. 어떤 진위도 따져보지 못했고, 어떤 책임도 물어보지 못했고, 어떤 사죄를 받을 여지도 남기지 못한 피해자의 안부는 안중에 없었다. 그 탓에 고인의 동지들이 그토록 고이 보내드리고 싶었던 장례식장 입구에 이런 손 팻말이 등장했다. "어떤 자살은 가해였다. 아주 최종적인 형태의 가해였다." (정세랑, ‘시선으로부터’ 중)

조용하고 절제된 사적 추모를 대신한 침묵에의 강요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피해자 측 대리인들이 기자회견을 계획하자 여권 인사들을 주축으로 한 장례위원회는 “생이별의 고통을 겪고 있는 유족들이 온전히 눈물의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회견을 재고해달라”고 했다. 이 위압적 호소를 보며 피해자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여권은 끝내 피해자에게 ‘피해자’의 지위도 양보하지 않았다. 늘 “피해자와 약자의 편”을 외쳤던 많은 여당 인사들이 이번 사안에 사과하는 순간에도 피해자를 ‘피해 호소인’, ‘피해 호소 여성’, ‘피해 고소인’과 같은 말로 불렀다. 마치 어느 쪽에 더 슬퍼할 자격이 있는가, 어느 쪽의 비명이 더 절박한가를 두고 피해자와 겨루기라도 하듯, 끝내 ‘피해자’란 호명을 삼갔다.

미안하지만, 최근 수 일간 여권에서 쏟아진 언사는 가해의 총화에 가까웠다. 모를리 없겠으나, 더불어민주당은 정치적 동지의 부재에 아파하기만 해도 좋은 피해자 그룹이 아니다. “안전한 법정에서 울부짖고 싶었다”, “수사 시작도 전에 증거인멸이 이뤄졌다”, “누가 국가를 믿겠냐”는 물음에 답해야 할 집권 여당이다. 부디 압도된 슬픔에서 마음을 추스르고 그 책임을 직시하는 데서부터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시간이다. 나중에 질러도 되는 비명을 가를 자격은 누구에게도 없다.

김혜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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