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원이 게이냐" 전화 폭탄… 입법권 흔드는 보수 개신교계

입력
2020.07.06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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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 89% 찬성' 차별금지법에 "동성애법" 반발 
전화ㆍ문자 공격에 장혜영 의원실 착신 전환
다른 인권 관련법도 철회 압박… “민주주의 훼손”



#1. 장혜영 정의당 의원실은 최근 사무실 대표번호를 다른 전화로 착신 전환했다. 지난달 29일 차별금지법안을 대표 발의한 뒤 보수 개신교계에서 "'동성애 옹호법'을 만드느냐"는 항의 전화가 하루 100통 이상 쏟아져서다. 장 의원의 개인 휴대전화로도 항의 문자가 빗발친다. 보수 개신교계는 차별금지법안을 공동 발의한 국회의원 9명의 연락처를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뿌리며 '총공격 지침'을 내렸다.

#2. 2018년 8월 학교ㆍ공공기관 등의 인권 교육을 의무화하는 인권교육지원법안을 발의한 정성호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38일 만에 법안을 자진 철회했다. 보수 개신교 단체들이 법안을 '동성애 옹호법’이라고 낙인 찍고 정 의원과 공동 발의자 19명에 전화ㆍ문자 공격을 퍼부었기 때문이다. “밤길 조심하라” 같은 협박은 예사였다. 법안엔 성적 지향 관련 조항이 들어 있지도 않았다. 보수 개신교계가 '인권이 들어간 이름이니 동성애 옹호법일 것'이라고 지레 짐작한 것이다.  

‘동성애 반대’를 주장하는 일부 보수 개신교 단체들의 무자비한 실력 행사로 국회의 입법권이 무력화하고 있다. 이들은 인권 관련 법안을 ‘대한민국을 동성애 천국으로 만드는 법'이라고 규정하고는 법안 제출ㆍ처리에 참여한 의원들을 집요하게 괴롭힌다. '지역 교인들을 동원해 낙선 운동을 하겠다'는 협박은 단골 수법이다. 

보수 개신교계의 ‘표’를 무시할 수 없는 정치권은 정면돌파 대신 굴복의 길을 택하고 있다. '인권ㆍ차별금지 법안 제출ㆍ처리 시도 → 무산'의 과정을 반복하며 개신교계의 힘이 오히려 커지는 악순환이 벌어진다. 



보수 개신교계는 교인들의 분노를 끌어 모으기 위해 조직적으로 움직인다. 2018년 2월 김부겸 당시 행정안전부 장관은 국회의원 신분으로 성별ㆍ종교 등을 이유로 혐오 표현을 사용하는 사람을 처벌하는 ‘혐오 표현 규제법안’을 발의했다. SNS에선 기독교 단체 명의로 “사실상의 차별금지법이다” “김 장관 법안이 동성애에 반대하는 국민을 범법자로 만든다”는 내용의 긴급 공지가 퍼졌다.

당시 김 전 장관의 포털 연관 검색어로 ‘동성애’가 뜰 정도로 공격은 위력적이었다. 국회 관계자는 5일 “개신교 단체가 법안 반대 글을 올리면 교인들이 모인 카톡 단체방ㆍ카페 등에 확산되는 건 순식간”이라고 했다.

보수 개신교도들의 '분노'가 어느정도 화력으로 쌓이면 다음 단계는 '총공세'다.  법안을 대표ㆍ공동 발의한 의원과 보좌진, 사무실 연락처를 살포한 뒤 업무가 마비될 때까지 공격하는 게 기본 수순이다. 민주당의 한 보좌관은 “다짜고짜 전화로 ‘당신네 의원이 게이냐’고 따진다. 법안의 본질적 내용에 대한 토론은 불가능하다”고 했다.

공격은 집요하고도 지능적이다. 지방자치단체들이 인권기본조례를 입법예고한 2015년, 반(反) 동성애 전문 유튜브 채널을 표방하는 ‘KHTV’는 '각 지자체 홈페이지에 민원을 넣으라'는 지령을 내렸다. 

19대 국회 때인 2013년 민주통합당(현 민주당) 김한길ㆍ최원식 의원이 차별금지법안을 발의했을 때는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소속 의원들에 항의 전화가 쏟아졌다. '차별금지법이 법사위에서 다뤄질 테니, 알아서 하라. 지켜보겠다'는 협박이었다. 최근 정의당이 차별금지법안 발의에 동참한 다른 정당 의원 명단을 꽁꽁 숨긴 것도 이 같은 선제 공격을 예상했기 때문이다. 



보수 개신교계의 가장 큰 무기는 '낙선 운동'이다. 2017년 충남기독교총연합회 등 지역 교계는 “동성애를 옹호하는 내용의 인권조례를 폐지하지 않으면 안희정 충남지사에 대한 낙선 운동과 주민 소환 활동을 하겠다”고 위협했다. 충남도는 이듬해 인권조례를 폐지했다. 19대 국회에서 차별금지법안 공동 발의자로 이름을 올린 의원들은 지역구의 대형 교회로 불려 나가 "법안을 철회하라"는 항의를 받았다. 민주당의 한 중진 의원은 “2013년 4월 재보궐 선거를 앞둔 시점이었다"며 "공동 발의 의원들에게 ‘종북’ 낙인까지 씌우는 바람에 당에서도 부담이 컸다”고 했다.

민주당 여성 중진 의원은 "총선 때마다 수백~수천 표로 당락이 갈리는데, 개신교계 표를 몽땅 버리고 갈 수 있는 간 큰 정치인은 없을 것"이라며 "정의당이 낸 차별금지법이 국회 본회의에 올라온다고 해도 찬성표를 던지긴 어렵다"고 했다.  

보수 개신교계의 이 같은 행태는 국회의 입법 기능을 위축시키고 민주주의의 근간을 흔든다. 신학자인 김혜령 이화여대 교수는 “다양한 윤리적 가치가 경쟁하는 정치의 장에서 누구나 각자 주장을 펼칠 수 있다”면서도 “시민 다수가 동의하는 차별금지법 제정과 관련해 소수의 보수적 기독교인들이 열렬히 반동성애 운동을 펼치는 것은 그들 스스로 자랑스럽게 여기는 자유 민주주의 원칙을 훼손하는 행동”이라고 꼬집었다.



국가인권위원회가 리얼미터에 의뢰해 올해 4월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88.5%가 ‘차별 금지를 법률로 제정하는 방안에 찬성한다’고 답했다. 홍성수 숙명여대 교수는 "특정 법안에 반대하는 사람이 많다고 해도 소수자 권리를 침해하는 것은 민주주의에 반한다"며 "정치권이 인권과 관련한 여론을 바로잡고 이끌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보수 개신교계는 “문제가 없다”는 입장이다. KHTV의 김광규 대표는 “대다수 국민들은 동성애에 반대하며, 반대 운동은 우리가 조직적으로 추진하는 게 아니라 국민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국가인권위의 조사는 편향적이고 잘못된 통계”라고 반박했다. 

박준석 기자
이혜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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