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시대의 사랑

입력
2020.06.30 22:00
27면


아내는 역시 현명했다. 나보다 한 수 앞을 읽었다. 그 잔소리는 위대했다. 몇 달 전만 해도 난 가장의 위세를 떨며 반항했다. “아니, 무슨, 식구가 남이야? 정나미 떨어지게…” 

 아내는 코로나 초창기부터 단호했다. 갑자기 구획이 네 칸 지어진 접시를 사오더니 모든 반찬을 각자 덜어먹을 것을 지시했다. 그리고 국자와 덜어먹기용 큰 젓가락을 내밀었다. 어쩌다 먹던 내 수저를 살짝 반찬이나 찌개에 대면 바로 지청구가 떨어졌다. 가히 ‘매의 눈’이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밥상머리 교육 좀 하려고 하면 “침 튑니다” 그랬다.

 이건 아니다 싶었다. 내 부모 때부터 당연했던 밥상 풍경이 아니었다. 잘생긴 뚝배기에 모락모락 보글보글 끓는 된장찌개에 이 숟가락 저 숟가락 넣고 웃어가며 함께 먹어야 하는데, 말 없이 모양 빠지는 종지에 덜어 먹으라니.  

 하지만 난 곧바로 깨갱했다. 세상이 바뀌고 있다는 걸 깨닫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게 ‘뉴 노멀’의 생존법칙이라는 걸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그 덕인지는 몰라도 우리 식구는 아직까진 무탈하다. 이제 혼밥을 먹을 때도 내가 냉장고에서 반찬통 꺼내, 먹을 만큼만 덜고는 바로 다시 갖다놓는다. 죽어도 나만 죽어야 한다.  

 각자 덜어 먹으니 변화도 생겼다. 적게 먹게 되고 식탁이 평등해졌다. 밥상에서의 서열과 권력 관계가 사라졌다. 가장이라고 먼저 숟가락 얹고, 굴비 한 조각 더 오는 게 아니었다. 

 밥상으로 운을 뗐지만 결국은 ‘식구’ 이야기다. 식구(食口), 아마도 어느 나라에도 이런 말은 없을 거다. 한영사전을 찾아보니 기껏해야 ‘패밀리 멤버’라고 번역된다. 중국에도 ‘자쭈(家族)’는 있지만 ‘식구’라는 말은 없다고 한다. ‘가족’이란 단어는 일본에서 왔다는 게 정설인데, ‘식구’는 언제부터 썼는지 인터넷을 찾아봐도 알 수가 없다.  

 그 사전적 풀이는 ‘한 집에서 함께 살면서 끼니를 같이하는 사람’이다. 밥을 함께 먹지 않으면 식구가 아닌 것이다. 

 식구, 오늘 이 두 글자를 가만히 토설해 본다. 어릴 때는 참 어감이 비속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자식과 가정을 갖고 보니 이처럼 치명적, 운명적이면서도 정겨운 단어는 없는 거 같다. 때론 다 주어버려야 할 것 같은, 눈시울 붉어지는 말이요, 저절로 미소가 지어지는 말이다. 

 보릿고개가 있고 입에 풀칠하기도 어렵던 시절, 음식은 아주 귀했을 거다. 때론 피보다 밥이 더 중요했다. 식구란 말에는 헌신, 희생, 눈물이 오버랩된다. 그래서 이 단어는 찐하면서 찡하다. ‘가족관계’는 있어도 ‘식구관계’는 없다. 식구는 관계가 아닌 것이다. 밥상공동운명체다. 

 식구는 ‘집밥’을 먹는다. 집밥은 집에서 먹는 밥이 아니다. 새끼와 에미, 애비, 밥상머리라는 유대가 섞이지 않으면 집밥의 자격이 없다. 밥은 만드는 게 아니라 집이나 옷처럼 ‘짓는’다. 집밥은 포복(飽腹)이 아니라 영혼의 허기를 채운다. 

 이제 그 ‘식구’가, 그 ‘집밥’이 변한다. 우리 민족이 원래 독상문화였다지만 그건 신분제 사회, 남녀차별 사회였기 때문일 게다. 지금은 그런 세상도 아닌데 독상문화로, 혼밥문화로 돌아가고 있다. 세계가 찬탄한 K방역의 나라치곤 너무 뒤늦은 ‘식생활 개선’이라는 말도 들린다.  이제 아무도 술잔을 돌리지 않는 것처럼 밥상문화도 자연히 그리 될 거라고들 한다.

 나는 아직도 다 큰 딸아이에게 생선 가시를 발라주고 싶다. “자, 아~” 하며 입이 터질세라 상추쌈을 넣어줄 때, “아빠는…”하며 눈을 흘기는 그 모습을 보고 싶다. 그런데 이제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없음을 엄숙히 받아들인다. 슬프지만 맞다고 생각한다. 코로나시대의 사랑은 달라져야 한다는 것을. 



한기봉 한국신문윤리위원회 윤리위원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 Copyright © Hankookilb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