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시민사회운동이 흔들리고 있다. 지난해 불거진 ‘조국 사태’와 정의기억연대(정의연) 후원금 유용 의혹 파문이 이어지는 동안 길을 잃은 시민사회운동의 민낯이 드러났다. 부실한 시민단체의 회계 장부를 통해 투명성은 의심을 받았고 정치무대로 달려가는 시민사회 활동가들은 비정부기구(NGO)의 정체성마저 혼탁하게 만들었다. 정부 및 기업과 함께 우리 사회의 한 축을 구성해온 ‘제3섹터’ 시민단체에 대한 신뢰도는 바닥을 모르고 추락하는 양상이다. 시민사회운동의 총체적 위기에 대한 진단과 해법을 4명의 NGO전문가들에게 물어봤다.
‘재벌 저격수’라 불리며 참여연대에서 활발한 활동을 해오던 김경률 회계사(경제민주주의21 대표)는 지난해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을 비판하며 관련 의혹에 ‘눈감았던’ 참여연대와 결별을 선언했다. 시민단체의 이중성을 일관되게 비판해온 그는 “이게 진정한 시민단체의 모습이라면 신뢰를 회복할 필요도 없다. 자업자득일 뿐”이라고 일갈하면서도 “아직 우리 사회에 시민사회만이 할 수 있는 제3의 영역의 역할이 남아있으므로 다시 시작한다는 마음으로 재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 회계사는 일련의 사태를 “황당하고 낯부끄러운 일”이라며 “진보의 민낯이 드러난 것”이라고 진단했다. 합리적 수준의 의혹 제기에도 정의연이 제대로 된 실태 조사 없이 “문제가 없다”고 공식 발표한 것은 성급했다는 지적이다. 그는 “이용수 할머니의 기자회견 이후, 언론을 통해 합리적 수준에서 여러 문제 제기가 있었다면 진상 조사와 징계 조치를 하는 것이 일반적인 문제 처리 과정”이라고 꼬집었다.
특히 연간 기부금 수익이 20억이 넘는 대형 시민단체에서 회계부실은 있을 수도, 있어서도 안 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김 회계사는 “입출금 내역, 기초 정보(raw data)만 제대로 작성해 세무사에게 넘기면 정의연 정도 규모의 단체는 하루 20분이면 투명성이 확보되는 장부를 공시할 수 있다”면서 “어려운 일이 아닌 기초적인 룰을 지키지 못했으니 어떠한 변명도 통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시민단체들이 앞장서서 무작정 정의연을 감싸고 돈 것도 김 회계사에겐 충격이었다고 한다. 그는 “‘대의명분보다 원칙이 앞서야 한다’가 시민운동의 제1원칙이 돼야 한다”고 말했다. 정의연이 일부 모금 활동을 윤미향 의원 등의 개인 계좌로 한 것을 두고도 “후원금을 모집할 때 차명계좌를 사용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인데, 일부 시민단체에서 ‘명망가의 계좌를 활용하는 건 자주 있는 일’이라고 옹호하는 걸 보고 어처구니가 없었다”며 “나와 함께 했던 사람, 나와 같은 편이라고 무조건 옹호하는 건 진영론적이고 편향적인 시각”이라고 일갈했다.
오랜 기간 국내외 시민단체를 연구해온 서유경(경희사이버대 교수) 한국NGO학회장은 정의연 후원금 유용 논란을 계기로 국내 시민단체들이 투명성과 책무성을 제고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서 교수는 "정부 입장에서는 직접 정부가 할 수 없는 일을 정의연이 해주다 보니 다소 관대했던 것 같다"며 "이번 논란으로 다른 시민단체들도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게 되면서 전반적인 정비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시민단체가 이익단체와 다른 것은 공익을 증진하려는 목표를 갖고 활동하는 것"이라며 시민단체들이 본인들의 정체성을 명확히 확립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목표 달성을 위해 정치적인 성향을 띠는 것이 필요하지만 누구든 비판할 수 있는 '거리두기'가 중요하다는 지적이다.
이어 그는 시민단체들이 세분화, 전문화되고 있는 만큼 특정 시민단체가 정치권력화되는 논란은 과도기적인 현상이라고 설명했다. 서 교수는 "시민단체 초기 일부 단체에 깨어있는 시민과 전문가들이 몰리면서 백화점식으로 확장됐었다"며 "하지만 이제는 여성ㆍ인권ㆍ환경 등 분야별 시민단체가 활동하고, 시민들의 역량도 커진 만큼 사안에 대해 다양한 목소리가 나올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와 함께 서 교수는 시민단체의 글로벌화를 강조했다. 현안들이 복잡해지면서 한 국가가 아닌 전세계적인 협력과 공조가 필요하면서 NGO의 활동영역도 넓어지고 있다. 반면 민주화 운동 세력이 주축인 시민단체 1세대들은 국내에만 머물고 있다는 것이다.
서 교수는 그런 측면에서 정의연의 활동도 아쉬움이 남는다고 설명했다. 그는 "윤미향 의원이 30년 간 싸우면서 위안부 문제를 바깥에 많이 알리는 성과를 냈지만 일본과 싸우는 문제에만 집중한 측면이 있다"며 "한일 위안부 문제를 아시아 종군 위안부 문제로 판을 넓혔으면 어땠을까란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황신애 한국모금가협회 상임이사는 이번 사태가 그동안 쌓여온 시민운동의 3개 주체, 시민단체, 시민(기부자), 정부 사이의 몰이해에서 비롯됐다고 분석했다. 황 이사가 분석한 우리 시민단체는 자신들의 ‘미션’, 즉 목적 사업에만 몰두한 나머지 시민들의 알 권리를 충족시키지 못하고 사회와 괴리됐다. 기부자들은 시민운동의 자기희생적 구조를 이해하지 못하고 후원금을 인건비나 운영비에 사용하면 불편한 기색을 내비쳤고, 정부는 시민단체가 도움을 요청하거나 협의할 수 있는 공식 소통 창구 하나 만들지 않은 채 ‘톱다운’ 방식의 일방 지시만을 반복했다는 게 그의 지적이다. 황 이사는 “소통이 잘못된 것은 일방의 문제가 아닌 개념과 사고방식, 사용하는 언어의 차이”라며 "정의연에서 '우리는 피해자 구호 단체가 아니다'라는 해명을 시민들이 받아들이지 못한 것도 양쪽 모두 자신만의 입장에서 시민운동을 바라봤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소통의 부족으로 인해 '모금 운동'이 시민사회운동의 목적, '사회 변화'보다 앞서는 주객전도 현상이 발생했다고 분석한다. 건강한 시민운동은 3자간 원활한 소통이 기반이 돼야 하는데, 제도와 인식이 한참 부족했다는 이야기다. 황 이사는 “그동안은 지나치게 ‘기부를 많이 해라’는 모금 운동만 강조돼왔다”면서 “이제는 시민단체가 직접 나서 ‘당신의 기부로 인해 이렇게 사회가 변했습니다’라고 설명하며 소통해 시민들의 지지를 이끌어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황 이사는 비영리단체 스스로 투명성을 제고하는 노력과 함께 정부나 사회가 이를 도와줄 중간지원조직을 구축할 필요가 있다는 입장이다. 그는 "시민단체에서 정부와 협의를 하려 해도 공식 창구조차 없는 것이 현실"이라며 "대형 시민단체 몇 곳이 비공식 루트를 통해 의견만 전달하는 게 전부”라고 꼬집었다.
특히 회계의 경우엔 운동에 전념하는 활동가들을 위해 법 제도 변화 등을 교육할 수 있는 자문 조직이 필요하다고 봤다. 황 이사는 "시민단체는 기부금 중 15%만 인건비 등 운영비에 사용할 수 있어, 특히 전체 기부금이 적은 소규모 단체의 경우 자문이나 회계 관련 인력 운영 등은 거의 불가능한 구조"라면서 "정부가 민간과 협의해 시민단체를 돕는 '중간다리' 역할의 조직을 만들어 시민단체가 자율적으로 역량을 키워 나갈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주성수 한양대 제3섹터 연구소 소장(공공정책대학원 명예교수)은 시민단체의 운동 환경이 2017년 촛불혁명을 기점으로 완전히 변했다고 분석했다. 시민운동의 핵심 주체가 '시민단체'에서 '개인 당사자'로 옮겨왔지만, 정작 시민단체가 그 변화에 적응하지 못해 각종 문제가 불거져 나왔다는 것이다.
주 소장은 "촛불혁명을 기점으로 시민들이 시민단체를 통하지 않고 내가 직접 SNS에 글을 올리고 거리로 나와 문제를 해결하려 행동하기 시작했다"면서 "미투 운동부터 갑질 폭로, 가습기 피해자 모임까지. 이제 노조 조합원들이 단체로 버스를 대절해 서울로 올라와 시위를 하는 시대는 지났다"고 분석했다. 개인의 힘으로 사회를 바꾼 역사적 현장을 목격하면서 시민단체 권력이 급격하게 줄었다는 것이다. 과거에는 거리로 나오지 못해 숨을 수밖에 없었던 장애인, 여성, 아동 등의 피해당사자들도 이제는 인터넷을 통해 운동의 전면에 나설 수 있게 됐다.
그는 시민단체 내에서 당사자들의 목소리가 배제된 것도 이런 현상의 핵심 원인 중 하나라고 분석했다. 시민단체 내 거버넌스가 당사자들이 배제된 채 전문가, 교수 등 엘리트 중심으로 꾸려졌다는 것이다. 소송 중심의 문제 해결 방식은 문제 당사자가 아닌 변호사들이 전면에 나서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주 소장은 "과거 시민단체의 운동방식은 '히트앤런"이었다"라며 "문제가 터지면 전문가 소수의 입장을 받아 성명서를 작성, 보도자료를 배포하고 거리로 나가는 식"이라고 꼬집었다. 이어 "이는 의사결정이 빠르고 효율적이란 장점이 있지만 이 과정에서 제보자들의 목소리가 사라졌다"고 덧붙였다.
주 소장은 일련의 과정을 시민운동의 개인화라고 명명했다. '정치 민주화' 시대를 지나 '생활 민주화' 시대에 접어들었다는 것이다. 그는 "앞으로의 시민단체는 당사자들과 더욱 더 밀착해야 한다"면서 "단체 내 이사회나 운영위원회 등에 당사자들이 포함돼 목소리를 반영해야 하며, 기부자들에게 회의록 등 관련 정보를 모두 투명하게 공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대형단체 중심의 시민사회 운동도 지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주 소장은 "2000년 이후 정부의 시민단체 지원은 공모사업 형태가 대부분이었는데, 이로 인해 대형 시민단체가 이를 독식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면서 "작은 단체들도 성장할 수 있는 인큐베이팅 시스템을 마련해 '비빌 언덕'을 마련해야 다양한 목소리를 낼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