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의 가장 미스터리한 용어 중 하나가 사찰을 절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한자는 중국 글자다 보니 당연히 중국 발음이 있게 마련이다. 우리 선조들은 여기에 우리말을 병치해서 암기하는 방식을 사용했다. ‘하늘 천(天)’을 보면, 우리 말은 하늘이고 중국 발음은 천이라는 의미다. 요즘으로 치면 ‘하늘(sky)’와 같은 결합 방식인 셈이다.
사(寺)는 ‘절 사’다. 같은 구조로 본다면, 절은 우리 말이고 사는 중국어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말에 해당하는 절이 무슨 뜻인지가 불분명하다는 것이다.
우리가 시간을 말할 때를 보면, 흥미롭게도 ‘시(時’)는 우리말로 읽고 ‘분(分)’은 중국말로 읽는 기이한 현상이 있다. 3시 10분을 예를 들어보자. 이를 읽으면 ‘세시 십분’이 된다. 그런데 앞의 시는 하나·둘·셋 등과 결합된 한시·두시·세시 등인 반면, 뒤의 분은 십분·이십분·삼십분·사십분 등으로 읽힌다. 즉 한·두·세는 순우리말이지만, 십(十)·이십(二十)·삼십(三十)은 한자어인 것이다. 이는 십삼분(十三分)처럼 분이 세분화하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왜 하나로 통일하지 않고, 우리말과 한자 표현을 같이 쓰는 것일까? 그것은 한자가 들어온 뒤에 분 개념이 세분화되면서 한자와 결합했기 때문이다. 이런 흔적이 지금까지 지문으로 남아 있는 모습이다. 즉 시간에서 시는 우리 것인 반면, 분은 빌려 쓰는 표현인 셈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기원을 추구할 때는 빌려온 것이 의미 파악이 쉽고, 처음부터 자생한 우리말은 원뜻을 알기 어려운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이는 너무 오래되어 기원을 추구하기가 용이하지 않기 때문이다.
‘절 사’ 역시 그렇다. 사는 중국에 최초로 건립된 사찰인 낙양의 백마사(白馬寺)에서 유래한다. 그런데 ‘때 시時(日+寺)’나 ‘귀글 시詩(言+寺)’ 등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寺’의 원발음은 사가 아니라 시였다.
처음 중국에 외국 승려가 오자, 후한(後漢) 정부는 이들을 어떻게 대우해야 할지 몰라, 당시 영빈관에 해당하는 홍로시(鴻盧寺)에 모셨다. 그런데 후일 이 홍로시가 사찰이 되면서, 시로 발음하기는 겸연쩍으니 음가(音價)를 사로 바꾼 것이다. 왜냐하면 시에는 관청, 즉 국가시설이라는 의미가 있었기 때문이다. 해서 지금도 옥편에서 寺를 찾으면, ‘절 사’와 ‘관청 시’의 두 가지가 살펴진다. 마치 金이 ‘성 김’과 ‘쇠 금’으로 나오는 것처럼 말이다.
이처럼 사(寺)의 기원은 분명한데, 절은 쉽지가 않다. 종래에는 이것이 신라불교 초전기의 모례(毛禮)와 관련된다는 주장이 있었다. ‘모례 → 털례 → 뎔례 → 절례 → 절’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절이 불교를 타고 전래하는 외래문화라는 점에서, 절이라는 말 자체도 우리말이 아닐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도 있다.
이는 크게 두 가지로 추론된다. 첫째는 간절하고 절절한 기원의 의미다. 기원의 문화야, 불교의 전래 이전부터 존재하던 것으로 이러한 기원의 성소라는 의미가 절이라는 단어로 귀결되는 것으로 보는 관점이다.
둘째는 절하는 장소로서의 절이다. 제사나 차례 등으로 인해, 절은 유교와 관련된 중국문화로 이해하는 분들이 많다. 그러나 절은 인도의 특징적인 예법이다. 이것이 동쪽으로 전파해서 동아시아의 예법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며, 서쪽으로는 이슬람 예배 방식의 한 축을 담당하게 된다. 즉 절이야말로 카레보다도 더 넓은 외연을 가졌던 고대에 가장 핫한 인도문화였던 셈이다. 호치키스가 스테이플러의 대명사로 불리는 것처럼, 절이라는 강렬한 예법 덕분에 절하는 집도 절이 되었다는 말이다.
이 중 무엇이 맞다기보다는 내용을 살펴보면, 양수겸장의 의미가 존재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절은 절을 하는 기원의 성소를 나타내는 의미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