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전쟁에 투입된 미군 장교 제임스 스톡데일은 1965년 포로로 잡혔다. 당시 수용소 동료들은 “곧 풀어 줄거야"라고 막연히 기대하거나 "결국 죽고 말거야"라고 포기하는 두 부류로 나뉘었다. 어떤 희망도 비관도 없이 그저 하루하루를 성실히 이겨낸 인물은 스톡데일이 유일했다. 그리고 8년 뒤 포로 중 스톡데일만 살아서 고국으로 돌아갔다.
스톡데일이 생환한지 50여년이 지난 현재, 그와 다른 의미로 같은 베트남 땅에 갇혀 버렸다. 전쟁의 창살이 아닌 감염병이 만든 창살 없는 감옥에 불과하나, 타지에서 삶과 죽음을 화두로 안고 사는 것만큼은 비슷하다. 개인사를 배제하고 주어를 동남아시아 국가들로 치환해도 상황은 크게 다르진 않다. 전쟁 포로들이 그러했듯, 각국 정부 역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종식까지 국가의 생명력 유지를 최대 목표로 잡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현 시점에선 동남아 그 어디에서도 스톡데일과 같은 대응을 찾아 볼 수 없다. 가까운 필리핀을 보자. 무력감 속에 동남아에서 가장 긴 수도 봉쇄(78일)를 이어가던 이 나라는 내수경제 위기설이 고조되자 준비 없이 격리를 풀어버렸다. 당연히 신규 발병이 폭발했고, 정부는 다시 국민의 자유를 빼앗았다.
줄곧 바이러스에 허우적대는 미얀마ㆍ라오스의 현실은 더욱 암담하다. "해외 차관으로 버티고 보자"는 경제운영 시스템 탓에 나라 살림은 더 이상 떨어질 나락도 없어 보인다. 코로나19 사태 초기 근거 없는 낙관론에 기대 외국인 입ㆍ출국을 방치했던 캄보디아도 뒤늦게 예산을 절반으로 줄이는 등 극약처방을 내놓기에 급급하다.
동남아 대국 베트남과 태국 역시 중심을 못 잡는 건 마찬가지다. 최근 중국을 탈출하는 글로벌 기업들을 잡으려 혈안이 된 양국은 그나마 유지하던 합리적 대응 기조를 놔버렸다. 재계 주장에 경도되며 국제선 재개 여부를 두고 국민들만 골탕을 먹고 있다.
심리학에선 합리적 낙관주의를 '스톡데일의 역설(Stockdale Paradox)'이라 부른다. 그 만큼 현실에선 구현되기 어렵다는 취지다. 그래도 우리는 스톡데일이 결국 살아 남았음을 기억해야 한다. 아직 코로나19는 끝나지 않았고, 바로 잡을 시간은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