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史 변곡점 ‘YH 사건 백서 발간’ 긴급조치 9호 위반, 41년 만에 재심

입력
2020.06.22 06:15
12면
법원, 김덕룡씨 면소 판결에 이례적 결정


박정희 정권 종말의 도화선 역할을 한 'YH 사건'에 대해 백서를 발간했다가 긴급조치 9호 위반 혐의로 구속기소된 김덕룡 김영삼민주센터 이사장 사건이 41년 만에 다시 법의 심판대에 설 수 있게 됐다. 긴급조치 사건에 한해 면소 판결에 대해서도 재심 대상이 된다고 봐야 한다는 법원의 전격적인 판단에 따라서다.

21일 법조계에 따르면 서울고법 형사20부(부장 강영수)는 김 이사장이 재심 청구 기각에 불복해 낸 즉시항고를 받아들여 재심 개시 결정을 내렸다. 이 판결이 확정되면 김 이사장은 41년 만에 재심을 받게 됐다.

김 이사장은 1979년 신민당 총재이던 고 김영삼 전 대통령의 비서실장으로 근무하면서 ‘YH무역 여공 신민당사 농성사건’의 백서를 발간했다가 긴급조치 9호 위반 혐의로 구속돼 재판에 넘겨졌다. YH 사건은 가발 수출업체인 YH무역의 여성 근로자들이 회사 폐업조치에 항의해 야당인 신민당 당사에서 농성시위를 벌이다 경찰의 해산 과정에서 추락사한 사건이다. 이는 훗날 김영삼 의원 제명 파동, 부마민주항쟁, 10ㆍ26사태로 이어졌고, 박정희 정권의 몰락에도 영향을 미쳤다.

문제는 김 이사장이 1심 선고를 받기 일주일 전인 1979년 12월 8일 긴급조치 9호가 해제되면서 면소 판결을 받았다는 점이다. 면소는 공소시효 만료 등으로 실체적 소송조건이 사라져 형사소송을 종결하는 것이다. 형사소송법상 면소는 ‘유죄의 확정판결’이 아니기 때문에 재심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이에 따라 이 사건에 대한 김 이사장의 재심청구는 올해 2월 서울중앙지법에서 기각됐다.

반면 항고심 재판부는 “이 사안과 같이 당초부터 위헌ㆍ무효인 긴급조치 9호로 면소 판결을 받아 확정된 경우에는 예외적으로 재심을 허용할 수 있다고 봄이 타당하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피고인은 긴급조치 9호 위반의 공소사실로 구속기소 됐음에도 실체심리를 통해 죄가 되지 않는다는 직접적인 판단을 받지 못하고 있다”며 “이는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기소돼 유죄 확정판결을 받은 사람들이 재심을 통해 무죄판결을 받을 수 있는 것과 비교할 때 형평에 어긋난다”고 지적했다. 또 검찰이 지난해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기소유예 처분을 받은 사람들에 대해 직권으로 사건을 제기해 ‘혐의 없음’ 처분을 한 것과 비교해서도 맞지 않다고 설명했다. 이어 “재심을 통해 무죄를 선고해 죄가 되지 않음을 밝혀주는 것은 피고인의 실질적 명예회복이라는 측면에서 재심의 대상으로 삼을 충분한 법률상 이익이 있다”고도 강조했다.

김진주 기자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 Copyright © Hankookilb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