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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륵 부처, 북쪽을 향해 서 있는 까닭은?

입력
2025.02.10 04:30
24면

편집자주

우리 역사를 바꾸고 문화를 새롭게 인식하도록 한 발견들을 유적여행과 시간여행을 통해 다시 한번 음미한다. 고고학 유적과 유물에 담겨진 흥분과 아쉬움 그리고 새로운 깨달음을 함께 즐겨보자.

<51> 충주 미륵대원사지

충주 미륵리 석조여래입상(충주시 수안보면). 북쪽에 위치한 덕주사 마애불과 정확히 마주 보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충주 미륵리 석조여래입상(충주시 수안보면). 북쪽에 위치한 덕주사 마애불과 정확히 마주 보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경주 석굴암이 한국의 미(美)를 상징하는 석가모니불을 모신 곳이라면, ‘고려식 미륵보살’을 모신 대표적인 석조(石造) 불교사원은 충주 미륵대원사지(彌勒大院寺址)다. ‘미륵’ 혹은 ‘미륵 부처’는 우리에게 대단히 친근한 단어다. 현재는 보살이지만, 다음 세상에 부처로 나타날 것이라 믿는 ‘미래 부처’인데, 역사 속에서 한국인의 정서가 담긴 불교 용어이기도 하다.

신라가 북으로 처음 진출했던 계립령(鷄立嶺, 또는 하늘재·충북 충주시 수안보면)을 넘어 남한강으로 내려가는 길목에 커다란 화강암 미륵불이 송계계곡을 내려다보고 있다. 고려 초기에 왜 이 첩첩산중을 도솔천(兜率天·미륵보살이 사는 곳)이라고 생각하고 상당한 규모의 석조 불사를 진행했을까? 그리고 왜 거대한 주불(主佛)은 북쪽을 향하고 있을까? 불전이나 탑 그리고 석등과 돌거북 외에도 경내에 이곳저곳에 보이는 고대 석물들이 이곳에 숨겨진 역사를 암시하는 듯하다.

충주 미륵대원지 위치도

충주 미륵대원지 위치도


대원(大院)과 미륵당

새로 생긴 수안보 기차역을 끼고 돌아서 지릅재를 넘는다. 조금 더 내려가면 바로 송계계곡으로 내려가는 갈래 길에 절의 입구 표지가 보이는데, 직진하면 바로 절터가 나타난다. 경북과 충북의 경계에 있는 조령 3관문에서 동북쪽으로 직선거리로 4㎞가량 떨어져 있다. 흔히 부르던 ‘중원미륵리사지’에서 ‘충주 미륵대원사’로 공식 명칭이 바뀌었다. 발굴된 명문 기와(銘文 瓦)와 역사 기록(고려사 최이傳 등)에는 대원사라고 나온다.

미륵당명문와편. 청주대 박물관 제공

미륵당명문와편. 청주대 박물관 제공

‘중원(中原)’이라는 명칭에는 ‘한반도 중심 땅’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 신라시대부터 충주를 중원경(中原京)으로 불렀다. 이 지역이 ‘미륵리’로 부르게 된 것은 이곳 부처의 모습에서 유래됐을 것이다. 이 석조사원 일대에서 발굴된 기와에 남은 명문이 바로 미륵당(彌勒堂)이었다. 미륵당은 바로 대원사의 주 불전, 즉 금당(金堂)이다. 삼국유사에 보이는 '미륵대원'이 바로 이곳이었을 게다.

송계리 대불정주범자비(충북 유형문화재). 고통받는 중생을 구제하는 내용을 담았다. 미륵리로 오르는 송계계곡에서 수습됐다.

송계리 대불정주범자비(충북 유형문화재). 고통받는 중생을 구제하는 내용을 담았다. 미륵리로 오르는 송계계곡에서 수습됐다.

그런데 왜 ‘대원사(大院寺)’라고 부르게 됐을까? 실제로 ‘원(院)’은 교통 거점에 설치됐던 관청으로, 관원이 공무를 다닐 때 숙식을 제공하는 거류지 역할을 하던 곳이다. 지난 1970년대부터 실시된 여러 차례 발굴을 통해 작은 개울을 두고 양쪽에 절이 배치돼 있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또 미륵당 동편의 넓은 공간에 드러난 건물터들이 바로 ‘역원(驛院)’ 터다. 당시 계립령을 오르내리는 나그네를 위한 시설이었고 아마도 절에서 관리했을 것이다.

마을이 드문 곳에는 절이 나그네들의 숙소 역할을 했지만, 남북교통요지인 이곳에는 큰 역원을 설치했을 것이다. 기록에 보이는 중원의 광수원(廣修院)일 것으로 추정된다. 그래서 절 이름에 관청 명이 붙지 않았을까?

1970년대 말 미륵대원사지 전경. 청주대 박물관 제공

1970년대 말 미륵대원사지 전경. 청주대 박물관 제공


자연에 동화된 절터, 도솔천

산에서 내려오는 두 갈래의 물길 사이에 가람이 배치돼 있다. 화강석 조형물인 가람은 크지는 않지만, 열을 지어 나타나 눈을 가득 채우며 신비한 산중 절간 풍광을 연상케 한다. 지붕 없는 석물들이 풍상을 견디며 그대로 노출되어 있으니, 문화유산이 즐비한 이 사찰 경내도 그저 자연의 한 부분인 듯한 착각이 일어난다. 병풍처럼 둘러쳐진 주변 산세와 소나무 숲, 도솔천 풍경이 이와 같지 않을까?

돌거북비 대좌

돌거북비 대좌

절은 20세기 큰 홍수에 피해를 입고 폐사됐지만, 지금은 ‘미륵세계사’라는 이름의 절이 조성돼 있다. 작은 돌다리를 건너자마자 마주치는, 복원되지 못한 채 누워있는 당간지주(幢竿支柱·당을 올리는 막대의 아래를 지탱하는 한 쌍의 석주)는 이 부근이 절의 입구였을 것임을 보여준다. 바로 그 위에 6m가 넘는 길이의 거북비대좌(석조귀부·충북 유형문화재 제269호)가 놓여있다. 완성된 조각이 아닌 듯한 모습이지만, 어깨 부근에 새끼 거북 두 마리가 기어오르는 모습이 새겨져 있어 대중의 인기가 많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다고 알려진 것인데, 아쉽게도 이 절의 내력을 말해 줄 비신(碑身·비문을 새긴 비석의 몸체)은 사라지고 없다.

미륵전에서 본 석등지 발굴 광경. 청주대 박물관 제공

미륵전에서 본 석등지 발굴 광경. 청주대 박물관 제공

높지 않은 단을 더 오르면 간결하게 만들어진 신라풍의 오층석탑이 중심을 지키고 그 뒤와 옆에 단아한 고려 석등이 서 있다.

등 뒤로 남쪽 햇살을 받은 채 북쪽을 향해 서 있는 미륵불의 모습

등 뒤로 남쪽 햇살을 받은 채 북쪽을 향해 서 있는 미륵불의 모습


‘서 있는 석굴암’이었을까?

가장 높게 조성된 단 중심에 높이 10m가 훌쩍 넘는 미륵부처(석조여래입상·보물 제96호)가 고즈넉한 미소를 띠고 서 있다. 마침 떠오른 겨울 아침 햇살이 부처의 뒤로 보이니, 이게 바로 진정한 화염광배(火焰光背)인 듯하다. 경사진 산 능선의 땅을 파고 큼직한 돌을 쌓아서 네모난 방을 만들었는데, 세 벽면에는 상하 두 줄로 보살과 신중(神衆·불법을 지키는 신장)을 배치한 감실들이 남아 있다. 거의 사라지고 없지만, 몇몇 곳에는 양각으로 된 조각이 남아 있어서 원래 모습의 장엄함을 상상하게 만든다.

미륵당 지붕구조 추정단면도. 충주시 제공

미륵당 지붕구조 추정단면도. 충주시 제공

지금은 사라지고 없지만, 높다란 목조 건물 위에 당호가 새겨진 기와지붕이 있었을 것이다. 또 전면에도 주초(柱礎)가 열을 이루고 있어 건물이 전실까지 덮고 있었음을 예상할 수 있다. 상당히 치밀하게 설계된 석조 불당이었음을 보여준다. 경주 석굴암의 석실과 기와지붕이 있었던 구조는 같다. 하지만 석굴암의 경우, 정교한 둥근 석조 천장이라는 점이 건축적으로 큰 차이를 보인다. 혹자는 미륵불이 큼직한 보개(寶蓋)를 쓴 채 서 있다는 점에서 ‘지붕이 없었을 것’이라고 의심한다. 하지만 발굴된 기와는 분명 덮개 지붕이 있었음을 증명한다.

이렇게 키가 큰 미륵부처님을 어떻게 실내에 모실 생각을 했을까? 또 석조법당의 건축 구조와 장엄하게 장식됐을 천장은 과연 어떤 모습이었을까?

미륵당 내 감실의 모습

미륵당 내 감실의 모습


한국형 불교, 미륵불 신앙

이곳 대원지 미륵불 몸통은 큼직한 돌 네 개로 조성됐고, 머리에는 얇은 팔각형 돌로 만든 보관(寶冠)을 썼다. 특히 얼굴 부분 돌이 유독 흰색이어서 ‘특별한 의미’를 담은 것이 아닌지 눈길이 간다. 또 돌하르방같이 짧게 강조된 손에는 용화수(龍華樹)를 들고 있다. 얼굴은 높이 18m의 은진미륵불(국보 제323호 석조미륵보살입상·충남 논산시 관촉사)만큼 강한 선은 아니지만, 뚜렷하게 표현돼 있다. 그런데 미륵이 이처럼 모두 강하고 투박한 이미지로 표현되는 것은 아니다. 최고의 한국예술품으로 꼽히는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국보 제78호, 제83호)은 부드럽고 섬세한 이미지다.

미륵당 서벽 감실의 부조판석. 서 있는 미륵불과는 달리, 앉아 있는 모습을 새겼다. 청주시 제공

미륵당 서벽 감실의 부조판석. 서 있는 미륵불과는 달리, 앉아 있는 모습을 새겼다. 청주시 제공

미륵불은 아미타불과 함께 우리 불교 신앙을 대표하는 불상이다. 내세에 대한 믿음을 상징하는 미래불(未來佛·내세에 성불해 중생을 제도한다는 보살)이지만, 인간 세상에 내려와 극락으로 인도한다는 점 때문에 현세와 밀접하게 표현되기도 한다.

미륵신앙은 신라시대에 화랑들 사이에서 크게 유행했다. 신라 향가 도솔가(兜率歌) 역시 미륵보살이 머무는 이상향 도솔천을 향한 노래다. 당시 사회를 구원할 미래 부처를 염원한 것이다. 후삼국 시대 태봉국의 궁예 역시 자신을 ‘미륵의 화신’이라고 했던 것도 이런 믿음에서 시작된 것이다. 앞서 언급한 은진미륵도 “못생겼다”는 이유로 보물로 격하됐다가 이후 ‘한국적인 모습’으로 재평가돼 2018년 국보로 승격(보물 제218호→국보 제323호)됐는데, 고려 초 광종(재위 949~975)이 지역 호족들에게 ‘내가 바로 미륵’이라고 하면서 세웠을 법하다.

대원사 미륵불상 역시 시대가 크게 다르지 않다. 나말여초(羅末麗初)의 혼란한 사회상 속에서 조성된 것으로 믿어진다. 세상이 어지럽고 힘들면 도솔천 같은 새 세상을 꿈꾸는 것이 인간의 마음이다. 마음속 그곳으로 데려가 줄 미륵이 있었기에 그렇게 험난한 역사를 참고 살아오지 않았을까?

온달의 공깃돌. 돌 위에 작은 부처를 올려 놓았다.

온달의 공깃돌. 돌 위에 작은 부처를 올려 놓았다.


계립령과 조령, 한 많은 고개

옛날에 ‘고개를 넘는다’는 것은 힘들고도 위험한 일이었다. 그래서 유명한 전설이나 감성을 자극하는 노래가 많다. 고개는 꼭 넘어가야 하는 사람을 한데 모으기도 하지만, 지형을 나누기도 해 헤어짐을 유발하기도 한다. 또 높은 곳이니 기다림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기록상 ‘제1호 고개’(서기 156년 개통) 계립령, 이후 1,300년 뒤에 개척된 조령, 두 고개 모두 한 많은 역사의 장소다. 온달산성, 그리고 온달이 묻혔다는 태장이 묘(방단적석유구·方壇績石遺構)가 죽령 북쪽 단양에 있다. 이곳 미륵대원사지에도 온달이 힘자랑하며 가지고 놀았다는 큼직한 공기돌이 바위 위에 동그랗게 남아 있다. 온달이 ‘계립령 서쪽 고구려 고토를 회복하지 못하면 돌아오지 않겠다’라는 서약을 했는데, 결국 죽어서 돌아간 것이다. 고려 공민왕도 홍건적난에 바로 이곳이 피란길이었을 것이다. 조선 태종 시절에 개척된 조령도 임진왜란 초기 탄금대에서 전사한 신립 장군의 회한이 서린 곳이다.

시대의 영웅 서사만이 있었겠는가? 고려 말기 학자 김구용(1338~1384)은 이 고개에서 헤어짐을 ‘창자를 끊는 비파 소리 듣는 것이 낫다(猶聽琵琶斷腸聲)’는 시도 남겼다. 그만큼 고개를 넘는 수많은 사람들의 기대와 회한이 서려 있는 곳이다. 그만큼 미륵이 절실했던 순간들이 많았던 장소가 바로 이곳 아니겠는가.

높이 13m에 달하는 덕주사 마애여래입상. 얼굴 부분은 부조로 옷자락은 음각선으로 표현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높이 13m에 달하는 덕주사 마애여래입상. 얼굴 부분은 부조로 옷자락은 음각선으로 표현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미륵부처, 왜 북쪽을 향해 서 있나?

우리나라 대표적인 화엄 도량인 부석사(경북 영주시) 중심 법당(무량수전) 건물은 남쪽을 향해 있고, 법당 속 부처는 서편에 좌정해 동쪽을 바라보고 있다. 서방정토를 상징하는 아미타여래불이다. 이 불상의 시선도 유래가 드물지만, 미륵대원사지의 미륵 부처도 북쪽을 향해 서 있는 것이 특이하다. 그 이유가 궁금하기 짝이 없다.

이 절 북쪽 덕주사엔 마애불이 있는데, 전설에 따르면 신라 마지막 왕자였던 마의태자(麻衣太子·미륵리 석불)와 그의 누이인 덕주공주(마애불)가 마주보는 모습이란다. 망국지한을 품은 두 남매의 가슴 아픈 시선을 상기시키는 이야기이지만 사실 속시원한 해답은 아니다. 질문은 오랜 기간 많은 방문객들의 화두가 됐지만, 창건자의 심오한 상징에 대한 멋진 답을 찾을 수가 없어 안타깝기만 하다.

배기동 전 국립중앙박물관장·한양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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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기동 전 국립중앙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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