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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년은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

입력
2025.01.27 04:30
23면

종교

편집자주

새로운 한 주를 시작하면 신발 끈을 묶는 아침. 바쁨과 경쟁으로 다급해지는 마음을 성인들과 선현들의 따뜻하고 심오한 깨달음으로 달래본다.

서울도서관 외벽 대형 글판인 서울꿈새김판에 '푸른 뱀'을 형상화한 새해 문구가 적혀 있다. 연합뉴스

서울도서관 외벽 대형 글판인 서울꿈새김판에 '푸른 뱀'을 형상화한 새해 문구가 적혀 있다. 연합뉴스

지난해 12월 31일 밤 12시, 제야의 종이 울리자, 일부 언론은 “을사년(乙巳年)이 밝았다”고 외쳤다. 그런데 새해가 시작된 건 맞지만, 을사년의 시작은 아니지 않은가? 조금만 생각해 보면, 을사년이 양력 1월 1일부터일 수는 없다. 이런 상황을 보노라면, 너무 생각 없는 보도를 하는 것 같다.

그러면 을사년은 음력 1월 1일, 설날에 시작되는가? 그런데 놀랍게도 간지(干支)가 바뀌는 것은 설이 아닌 입춘(立春)이다. 입춘은 보통 양력 2월 4일을 기점으로 3~5일에 든다. 올해도 2월 3일이 입춘이다. 그러므로 ‘제야의 종’ 이후로 무려 1달여가 지나야 을사년이 시작된다. 오차치고는 너무 크지 않은가?

그러면 왜 입춘에 간지가 바뀌는 걸까? 분명하진 않지만, 황하문명인 은나라에 앞선 전설적인 왕조 하나라에서 입춘을 기준으로 한 해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봄을 기점으로 한 해를 상정한 것이 후대까지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공자가 좋아한 주나라의 새해 시작점은 동지(冬至)였다. 이는 태양을 중심으로 한 해의 기준을 비정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역시 현재까지 문화적인 흔적을 남기고 있는데, 동지를 작은 설, 즉 ‘아세(亞歲)’라고 했고, ‘동지 팥죽을 먹으면 한 살 더 먹는다’는 말도 있다.

간지 즉 띠가 입춘을 기점으로 바뀌는 바람에 설날~입춘 사이에 태어난 분들은 자신의 띠를 헷갈리기도 한다. 실제로 입춘 전에 태어난 분이 ‘올해 환갑’이라길래 필자가 그분의 환갑을 1년 늦춰드린 적도 있다. 속칭 ‘윤석열 나이’처럼, 순식간에 1년이 젊어지는 마법(?)이 입춘으로 인해 펼쳐진 것이다.

그렇다면 을사년은 왜 ‘푸른 뱀의 해’가 되는 걸까? 이건 10간을 5행에 맞추는 과정에서 특정 색이 배속되기 때문이다. 간략히 정리하면, △갑을-목-파랑 △병정-화-빨강 △무기-토-노랑 △경신-금-하양 △임계-수-검정이다. 이 중 을사년의 을은 ‘목-파랑’에 속하기 때문에 푸른 뱀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띠를 색깔과 연결하는 것은 과거에는 거의 없던, 현대의 상술일 뿐이다. ‘빼빼로 데이’나 ‘블랙 데이’처럼 새로운 변화라고 이해하면 되겠다. 과거에는 백말띠 외엔 띠를 색깔과 연결하는 경우가 없었다. 또 생각해 보면, 다른 색은 그렇다 해도 불길한 느낌의 검정과 연결된 ‘임계’는 매번 문제가 될 수밖에 없지 않은가.

가뜩이나 ①동지 ②양력 설 ③음력 설 ④입춘으로 새해의 기준이 많아 헷갈리는데, 굳이 상업적인 추임새까지는 넣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싶다.


자현 스님·중앙승가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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