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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핵사태 속 '야성난순'(野性難馴)의 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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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한 주를 시작하면 신발 끈을 묶는 아침. 바쁨과 경쟁으로 다급해지는 마음을 성인들과 선현들의 따뜻하고 심오한 깨달음으로 달래본다.
ⓒ 한국일보 자료사진
산에 사는 노인이 호랑이 새끼 한 마리를 주웠다. 집으로 데려와 마당에서 길렀다. 날이 갈수록 덩치가 커져 완연한 호랑이가 되었지만 자식이 부모를 따르듯 노인을 따랐다. 노인의 아내는 호랑이가 사나우니 조심하라고 했지만 노인은 듣지 않았다. 결국 노인은 자기가 기르던 호랑이에게 물려 죽고 말았다. 조선 중기 시인 최경창의 <양호사(養虎詞)>에 나오는 이야기다. 최경창은 말했다. "사람들은 노인이 어리석다 비웃지만 나는 노인이 원통하다고 생각한다." 노인은 잘못이 없고, 배은망덕한 호랑이가 잘못이라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호랑이는 맹수다. 맹수의 본성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수만 년 동안 인간과 함께 살면서 길들여진 가축과는 다르다. 꼬리를 흔들며 아양을 떨다가도 언제 사람을 공격할지 모른다. 하물며 맹수에게 윤리와 도덕을 기대하다니, 터무니없는 생각이다. 애당초 맹수를 가축처럼 기른다는 것부터가 잘못이지만, 부득이 길러야 한다면 맹수가 언제든 본성을 드러낼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만반의 준비를 다해야 한다. 판다 할아버지가 항상 철창을 사이에 두고 '푸바오'를 마주하던 것처럼 말이다. 아무리 귀엽고 온순해도 판다는 결국 맹수다. 노련한 사육사는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양호사>는 맹수의 본성을 망각한 어리석은 노인의 이야기다.
맹수의 본성은 야생동물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 마음속에도 깃들어 있다. 공익을 해쳐서라도 사익을 추구하려는 본성, 권력을 독차지하고 타인을 지배하려는 본성이다. 그 본성을 억누르기 위해 만들어진 게 제도와 법률이다. 기업은 걸핏하면 규제 때문에 기업 하기 어렵다고 불평하지만, 왜 그런 규제가 만들어졌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규제의 족쇄가 조금이라도 느슨해지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익을 추구하려는 맹수의 본성이 언제라도 깨어난다.
권력을 분산하고 복잡한 절차를 만들어 놓은 것도 권력을 독차지하려는 맹수 본성이 언제 폭주할지 몰라서다. 손발이 묶였다고 불평해도 소용없다. 이번 탄핵 사태에서 다시금 확인했다. 다른 정치인이 권력을 잡으면 다를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호의와 신뢰에 기댈 일이 아니다. 맹수의 본성을 가두는 제도의 철창을 튼튼히 정비해야 한다. 사람이 기른 호랑이가 사람을 물어 죽이는 것처럼 국민에게 나온 권력으로 국민을 겁박하는 일이 반복되게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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