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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여 년 전 악몽에 또 사지가 떨려"… 4·3, 5·18 피해자가 본 '서울의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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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일 새벽 3시, 유독 일찍 눈을 뜬 강춘희(78)씨는 홀린 듯 뉴스를 틀었다가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계엄'. 두 글자에 강씨는 세 살이었던 1948년 4월 3일로 되돌아갔다. 불타는 제주도 연미마을의 모습이 너울대고, "계엄군이 온다" "담 뒤에 가서 숨으라"던 돌아가신 어머니의 비명이 귓가를 울렸다.
#2 5·18 광주민주화 운동 당시 계엄군에 끌려가 고문을 당했던 김공휴(64)씨도 최근 트라우마(정신적 외상)가 재발했다. 무장 군인들이 국회의사당에 진입하는 모습에 사지가 부들부들 떨렸고, 불안과 불면이 도진 탓에 다시 정신과를 찾았다. 질문 하나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계엄이 성공했다면, 우린 지금쯤 어떻게 되었을까?' 상상도 하기 싫은 가정이지만, 김씨는 답을 알고 있다.
온 국민을 충격에 빠트린 '12·3 불법계엄 사태'는 국가폭력 피해자들에겐 특히 더 악몽이었다. 포고령까지 발표되자 과거처럼 군사정권이 들어서 가족을 해칠 것 같다는 두려움이 닥쳤다고 한다. 11일 한국일보는 제주 4·3사건, 5·18 민주화운동, 부마민주항쟁 등 국가폭력 피해자 10명을 만났다. 국가로부터 당한 상처를 간신히 딛고 살아가던 이들은 '서울의 밤' 이후 40여 년 전이 떠올라 또 공포와 불안에 시달리고 있었다.
5·18 당시 오빠를 잃은 김형미(60)씨는 "계엄군에 구타당해 (세상을) 떠난 오빠 생각이 나 죽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며 "(계엄이) 해제되고도 2·3차 계엄이 걱정돼 한참을 떨었다"고 회상했다. 국가를 상대로 한 손해배상 청구에 나섰던 이창곤 부마민주항쟁기념사업회장도 "피해 사실을 인정받기 위해 목소리를 낸 것이 문제가 돼 계엄사에 끌려갈까 두려웠다"고 털어놨다.
사실상 계엄을 총지휘한 정황이 드러나고 있는 윤석열 대통령과 계엄 후 책임자 처벌은커녕 탄핵 표결조차 불참한 여당에 대한 분노의 목소리도 컸다. 5·18 당시 대자보를 붙이다 경찰에 끌려가 고문을 당했다는 임태경(61)씨는 "1980년 광주에서, 2024년엔 국회에서 국민에게 총부리를 겨누라고 지시한 군 상부가 이해되지 않는다. 국민도, 동원된 군인도 모두 피해자"라며 "당리당략이나 출세를 국민과 맞바꿔선 안 된다"고 일갈했다. 양성홍 제주 4·3행방불명유족협의회장도 "그간 '빨갱이' 낙인과 연좌제 때문에 4·3사건은 최근에야 공론화가 됐다"며 "정부에 대한 신뢰가 이제 겨우 조금씩 쌓이고 있었는데, 다시 큰 상처를 받았다. 연루자들을 다 잡아들여야 한다"고 촉구했다.
피해자들은 두려움을 딛고 거리로 나가 탄핵을 촉구하는 시민들과 함께하고 있다. 5·18 희생자나 부상자의 어머니, 아내 등으로 구성된 '오월어머니집'은 지난 6일 광주 집회 참가자들에게 손수 만든 주먹밥을 나눠줬다. 단체 관계자는 "저항하는 시민들을 위해 주먹밥을 쌌던 민주화운동 때처럼 이번에도 연대 정신을 보여 줄 것"이라고 강조했다. 비상계엄을 수습하는 과정이나 이후 탄핵 집회에서 드러난 민주주의를 향한 우리 국민의 열망이 반가웠다는 의견도 있었다. 현재 상담사로 일하고 있는 부마항쟁 고문 피해자 출신 최갑순(68)씨는 "젊은이들과 K팝이 탄핵 집회의 주축이 되고, 상담 청소년들로부터 '왜 선생님이 나라 걱정에 몸을 던졌는지 이제 이해가 된다'는 연락도 온다"며 "국민이 깨어 있지 않으면 민주주의는 언제든 침탈될 수 있다는 사실을 전 국민이 알게 됐을 것"이라고 힘줘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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