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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잡은 호미 대신 붓을 쥔 박안나 할머니 "디자이너 명함에 가슴 벅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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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30일 박안나(왼쪽) 할머니가 전북 김제 용평마을 자택에서 황유진 사회적기업 이랑고랑 대표와 '디자이너 박안나'라고 쓰인 명함 모형을 들고 있다. 김제=김혜지 기자
“저는 박안나고요. 뭘 자랑거리는 없읍(습)니다. 국민학교(초등학교) 다니다 6·25 때문에 5학년 2학기 후반기에 그만뒀습니다. 황(유진) 선생님 권유로 디자이너 일을 할 건데 같이 재미잊(있)게 하겢(겠)씀(습)니다.”
전북 김제시 광활면 용평마을에 사는 박안나(86) 할머니가 지난해 6월 문화·예술 교육을 전문으로 하는 사회적기업 ‘이랑고랑’에 인턴 디자이너로 채용되고 난 뒤 쓴 자기 소개다. 연필로 꾹꾹 눌러 쓴 글씨는 삐뚤빼뚤하고 한글맞춤법에도 맞지 않지만 난생처음 도전하는 디자인에 기대와 설렘으로 가득하다. 한평생 농사일을 하다 어엿한 정규직 디자이너가 된 박 할머니를 지난달 30일 자택에서 만났다.
박 할머니는 이제 밭에서 보내는 시간보다 그림 그리는 시간이 더 많다. 그의 주름진 손에는 어김없이 붓이 쥐어져 있었다. 거실 한쪽에 놓인 캔버스 위에 그려진 꽃잎에는 수술까지 세밀하게 묘사돼 있었다. 박 할머니는 “허리는 많이 굽었지만 아직 눈(시력)은 좋다”며 "새, 꽃, 풀 등 주로 자연을 벗 삼아 그림을 그린다”고 했다. 자신의 몸집만 한 캔버스를 품에 꼭 안은 채 말 없이 작업에 집중하던 그는 “이웃집 할머니가 놀러 왔는데 내가 그림 그릴 때 숨소리조차 내지 않아 죽은 줄 알았다고 하더라”며 소리 내어 웃었다. 하루도 빠짐없이 그림을 그리다 보니 기다란 4B 연필이 몽당연필이 되기 일쑤다. 고된 작업이지만 꿈조자 갖지 못했던 삶에서 하루하루 꿈같은 나날을 보내고 있기에 힘든 줄도 모른다. 박 할머니는 “’디자이너 박안나’가 새겨진 생애 첫 명함까지 나와 가슴이 벅차다”고 말했다.
박안나 할머니는 매일 하루도 빠짐없이 그림을 그린다. 짧아진 4B 연필과 함께 할머니가 쓴 글(왼쪽). 오른쪽 사진은 할머니가 그동안 그린 그림들이다. 김제=김혜지 기자
박 할머니는 조각가 황유진(41) 이랑고랑 대표의 권유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황 대표는 2019년 김제시 요청으로 벽화그리기 사업에 참여한 것을 계기로 5년째 이곳 할머니들과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황 대표는 “당시 벽화를 함께 그릴 청년들을 불러 달라고 김제시에 부탁했는데 70, 80대 할머니와 할아버지들이 모여 있었다”며 “알고 보니 마을에서 가장 어린 분들을 보냈던 것”이라고 돌이켰다.
이후 황 대표는 할머니들을 위해 지인인 연극 배우와 함께 연극 수업을 열고 크레파스와 물감, 붓 등을 제공한 뒤 그림 수업을 했다. 황 대표는 “할머니들의 뛰어난 관찰력과 섬세함에 깜짝깜짝 놀란다”며 “할머니들을 보면서 오히려 제가 용기를 얻고 희망이 생겼다”고 했다.
한 출판기업에서 발간한 책 표지에 쓰인 박안나 할머니 작품(왼쪽). 오른쪽은 전주시 덕진동에 있는 인테리어 소품 가게에서 판매되고 있는 할머니들의 그림이 새겨진 소품들. 김혜지 기자
할머니들의 재능을 혼자만 알고 있기에 아쉬웠던 황 대표는 정부 공모 사업이나 기업과 연계한 다양한 사업을 찾아 나서기 시작했다. 박 할머니를 인턴으로 채용한 것도 한 은행에서 지원하는 인턴십 사업 덕분이었다. 팝업스토어와 일러스트페어 등을 통해 할머니들이 그린 그림을 알릴 수 있도록 직접 발품을 팔고 있다. 현재는 할머니들의 그림이 새겨진 옷, 열쇠고리, 손수건 등이 전주를 비롯해 서울에 있는 소품 가게에서 판매되고 있고, 한 출판기업에서 발간한 책 표지에 박 할머니 그림이 쓰이기도 했다.
황 대표는 제주 본태박물관이 ‘호박’ 작품으로 유명한 세계적인 작가 구사마 야요이 특별전을 6개월간 진행해 6만여 명의 관람객이 다녀간 사례를 들며 “할머니들의 작품을 보기 위해 수많은 사람의 발길이 김제 용평마을로 이어졌으면 좋겠다”며 “이곳을 예술인 마을로 만드는 게 꿈”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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