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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왜 '가짜노동 천국'이 됐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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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우리는 노동 현장에 몸담았습니다. 눈코 뜰 새 없이 하루를 끝내고 나면, 문득 물음표가 떠오르지 않나요? 상사 보고를 위해 30분을 기다렸고, '일하는 티'가 듬뿍 담긴 보고서를 쓰는 데 2시간을 보냈고, 밤 늦게까지 팀원들과 술을 마셨고···. 일다운 일을 한, '진짜 노동'을 한 건 몇 시간일까요. 그래서 한국일보는 누구나 공감하지만 여전히 바뀌지 않는 '가짜 노동'의 현실을 고발합니다. 당신의 삶을 흔드는 그 비효율성에서 노동자 모두가 해방되기 위한 길을 모색해 봅니다.
'누구는 공순이라 부르는데 / 그 지역 정문 아닌 후문에 /
정오만 되면 어김없이 나타나는 / 이동식 포장마차 대열 /
거기에 차려놓은 / 번개식당의 다양한 메뉴 /
1분 막국수 2분 짜장면 3분 김밥.'
1970년대에 활동한 이선관(1942~2005) 시인의 시 '번개식당을 아시나요' 중 한 대목이다. 번개처럼 밥을 먹고 '주7일' 근로를 하며 장시간 노동에 투입됐던, 당시 노동자들의 고단한 생활을 엿볼 수 있다.
물론 전국민이 죽도록 일한 대가는 눈부셨다. 1963년 103달러에 불과했던 한국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1977년 1,000달러를 넘어섰고, 1994년 1만 달러를 뛰어넘었으며, 지금은 3만 달러를 훌쩍 넘어 선진국 문턱을 지났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최빈국이 이렇게 선진국 반열에 오른 나라는 전세계에서 한국이 유일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한강의 기적'을 일구는 과정에선 자본이 없었기에, 결국 투입할 것은 '노동'뿐이었다. 정세은 충남대 경제학과 교수는 "노동자들의 긴 노동시간과 희생이 큰 역할을 한 것은 부정할 수 없다"며 "당대 이룩한 경제성장의 80%이상의 공로를 인정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노동만 집중적으로 투입하면 만사가 형통했던 달콤한 시기를 잊지 못해서일까. 노동자의 희생으로 이뤄낸 고속 성장 경험 탓에, 한국사회에는 굳건한 믿음이 하나 자리 잡았다. 바로 '일하는 시간이 길면 산출물이 그만큼 늘 것'이라는 확신이었다. 경제개발 초기 단계에서 즉효약이었던 이 '장시간 노동' 처방은 시간이 이어지며 이내 '사회적 노동 규범'으로 자리잡았다. 초과근무와 야근을 미덕으로 삼는 문화, '오래 일하는 직원이 성실하고 능력있다'는 인식도 함께 자라났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엔 근무시간이 생산성을 담보하지 않는다. 그러나 노동의 한계생산이 사실상 0에 수렴해 자본이나 기술이 더욱 중요해진 고도 성장 단계가 되어서도, 장시간 노동은 신성한 가치로서 위상을 유지하는 중이다. 2022년 기준 한국인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8개국 중 다섯 번째로 많은 1,901시간을 일했지만 노동생산성은 시간당 49.4달러로 33위에 그쳤다.
뭔가 일은 하는데, 정작 생산성은 떨어지는 현상. 꽤나 많은 우리의 일이 사실상 필요 없는 '가짜노동'이라는 방증이다. 손연정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은 "일을 안 하면 안 되니까 △하지 않아도 될 일을 만들거나 △일이 있는 척 연기를 하는 것"이라며 "결과적으로 눈치노동, 허식노동 등 다양한 형태로 드러나고 있다"고 말했다.
"최근 OO그룹이 직원 대상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오후 7~8시 퇴근한다는 답변이 31%를 차지했고 오후 8~9시 퇴근한다는 직원이 23%를 차지했다. 자정 이후 퇴근도 5%나 됐다. 퇴근 지연 이유로는 ‘잔무 처리를 위해’가 51%로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했고 ‘특별한 일은 없지만 상사가 퇴근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응답도 35%를 차지했다."(2002년 3월 4일 한국일보 기사)
덴마크 학자들(데니스 뇌르마르크, 아네르스 포그 옌센)이 고안해 낸 가짜노동(바쁜 척하기 또는 노동과 유사한 무의미한 업무). 이 개념이 정작 덴마크보다 한국에서 더 설득력있게 받아들여지는 이유는 이 나라가 가짜노동을 쑥쑥 키울 최적의 온상(溫床)을 장기간 만들어왔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일단 무한경쟁사회가 가짜노동의 진화를 부추겼다는 가설을 유력하게 내세운다. 어릴 때부터 경쟁 틈바구니 속에서 생존해야 번듯한 직장에 들어가고, 그 직장에서도 각종 줄세우기 경쟁이 다시 시작된다. 그래서 일이 없다거나 잠시 널널하다는 것은 곧바로 무능력을 의미했다. 이 현상을 김종영 경희대 사회학과 교수는 "경쟁사회에서는 효율에 대한 고민보다는, 어떻게든 일을 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중요했을 수 있다"고 진단한다.
전통적인 유교 문화와 일제가 남긴 군대문화가 결합하면서, '윗사람 한 분'만을 위한 의전노동이 횡행하기도 했다. 대기업이나 공공기관에서 유독 의전행사의 중요도가 높은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의전노동의 필요성을 완전히 부정할 순 없지만, 직장인들은 그 규모가 '본업'을 방해할 만큼 너무 비대해졌다고 토로한다. 이병훈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한국 사회에 뿌리 박힌 윗사람에 대한 공경문화, 연공서열주의 문화가 직장으로까지 이어진 결과"라고 말했다.
얼마나 심할까? 5급 공무원 20대 A씨는 "작은 행사에도 간부들이 참석한다"며 "식순, 행사개요, 말씀 내용 등 자료들을 보고하고 준비하느라 정신이 없고 과하다 싶은 순간들이 많다"고 토로했다. 그는 의전노동만 줄어도 주당 4시간은 덜 일할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외교계 종사자 B씨도 동감했다. 그는 "저명인사들의 허황된 말에 불과한 콘퍼런스를 준비하는 게 일의 대부분"이라며 "높은 분을 어디 앉혀야 하고, 동선을 체크하는 등 머리 아픈 일이 적지 않다"고 호소했다.
"한국통신(현 KT) 노조가 출근시간 지키기 투쟁에 돌입하면서 '준법투쟁' 적법성 여부를 놓고 논란이 제기되고 있다. 노조는 정시출퇴근, 점심·휴식시간 지키기 등 법을 어기지 않은 범위에서 의사표시를 합법 행동이라고 주장한다. (중략) 그러나 검찰은 준법투쟁이 사법처리 대상이 된다고 결론지었다. 검찰의 근거는 노사협약에 '사장이 필요에 따라 시간외근무를 하도록 지시할 수 있다'는 규정이 존재한다는 것이다."(1995년 5월 27일 한국일보 기사)
위 기사에서 보듯 한국은 사무직 노동자들이 '합법 투쟁'을 해도 검찰이 "아니, 그거 불법"이라고 간주해 노동쟁의를 원천적으로 틀어막던 나라다. 더군다나 그간의 노동자 투쟁은 임금이나 복지 문제에 치중해 있었기에, 가짜노동과 관련한 논의는 이뤄지지 못했다. 김종진 일하는시민연구소장은 "최근에서야 업무 효율과 근무시간에 대한 목소리를 내고 있지만 그전까지는 관련 투쟁이 전무했다"며 "지금까지의 투쟁이 임금, 복지 등 구조적 문제에 집중해 왔기 때문에 가짜노동에 대한 고민은 끼어들 틈이 없었다"고 말했다.
한국 특유의 '기업=갑'이라는 인식도 직장인들의 목소리를 위축시켰다. 1997년 외환위기를 기점으로 일자리 안정성에 대한 민감도가 높아지자, 자연스럽게 직장 내에는 '안 짤리는 게 최선'이라는 인식이 퍼졌다. 김성희 L-ESG평가연구원장은 "90년대 초까지만 해도 자유로운 조직 분위기를 권장하는 움직임이 있었지만 외환위기를 기점으로 무너졌다"며 "권위적인 조직 문화와 더불어 일자리 안정성 문제가 겹쳐 직장인들이 더 목소리를 내기 힘들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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