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행한 우연을 운명으로 서사화하는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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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23.10.03 04:30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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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 어맨다 녹스

부실 수사와 무책임한 언론 보도, 마녀사냥식 언론 보도 등으로 20대의 만 8년을 송두리째 빼앗겨야 했던 어맨다 녹스. 위키피디아


미국인 어맨다 녹스(Amanda Knox, 1987~)가 겪은 불운과 시련은 평범한 일상이 얼마나 허술한 기반 위에 놓인 것인지 새삼 실감케 한 사건이다.

그의 삶은 이탈리아 유학 중이던 2007년 11월 2일, 룸메이트였던 21세 영국인 유학생 메러디스 커처의 시신이 발견되면서 엉키기 시작했다. 전날 밤을 당시 연인이던 이탈리아 남성 솔리치토와 보내고 귀가한 녹스는 처음엔 욕실에 묻은 핏자국도 커처의 방문이 잠겨 있던 것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고 한다. 오후까지 커처가 일어나지 않는 게 이상해진 그는 지인들과 함께 강제로 문을 열고서야 잔인하게 살해된 커처의 시신을 발견했다.

경찰은 현장 지문과 커처의 체내 DNA 등을 증거로 사건 직전 알게 된 서아프리카 출신 한 이민자 남성을 체포했다. 그리고 녹스-솔리치토 커플의 일관되지 않은 진술과 솔리치토의 집 부엌칼에서 커처의 DNA가 극미량 검출된 점을 근거로 녹스 커플을 공범으로 기소했다. 넷이서 난잡한 밤을 함께 보내다 어떤 사정으로 셋이서 커처를 살해한 뒤 은폐하려 했다는 게 경찰 시나리오였다. 이탈리아 언론은 연일 녹스의 사생활을 까발리며 그를 '희대의 악녀'로 묘사했다.
주범은 2008년 30년형을, 공범으로 기소된 녹스와 솔리치토는 이듬해 각각 26년형과 25년형을 선고받았다. 녹스 커플은 2011년 10월 3일 항소심에서 '증거 오염 가능성' 변론으로 무죄 판결을 받았지만 2013년 재심으로 다시 구속됐고, 2015년 3월 최종심에서야 무죄 확정 판결을 받았다. 그들이 천국과 지옥을 오간 사이 미국과 이탈리아 언론과 여론은 서로를 불신하며 비난했다.

녹스가 받은 배상은 체포 직후 피의자의 권리를 보장받지 못한 데 대한 유럽인권재판소 판결로 인정된 배상금 2만 달러가 전부였다. 현재 녹스는 형사피의자 및 재소자 인권운동가로 활동하고 있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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