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판만 되면 '잠수' 타는 피고인... 공판 지연의 주된 이유

입력
2023.09.30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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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미제 사유 중 피고인 불출석 30%
법관 인사 나면 "녹음 듣자"며 생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서울고법 청사 전경. 한국일보 자료사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서울고법 청사 전경. 한국일보 자료사진

"수사까지는 얌전히 받다가 기소만 되면 사라져요. 마음 같아선 직접 나가 잡아오고 싶죠."

도박 자금 마련을 위해 사기 범행을 일삼던 A씨는 2021년 경찰에 덜미를 잡혀 사기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1심 재판에 한 차례도 출석하지 않았던 그는 공시송달(법원 게시판이나 관보에 송달 내용을 게재하는 것) 끝에 징역형이 선고되고 나서야 "재판 진행을 알지 못해 항소도 못했다"며 상소권 회복을 청구했다. 상소권 회복은 불가피한 사유로 항소나 상고를 못한 경우 법원 결정으로 소멸한 상소권을 살려주는 것이다.

법원은 불가피한 사정이 있었다고 보아 A씨를 풀어줬다. 그러나 A씨는 2심 시작과 동시에 또다시 자취를 감췄고, 결국 2심 재판부 역시 공시송달을 거쳐 A씨에게 징역 8개월을 선고했다. A씨는 그제서야 슬그머니 나타나 정해진 수순처럼 '상소권 회복'을 내세우며 대법원에 상고했다. 대법원은 올해 6월 A씨 주장을 받아들여 사건을 의정부지법으로 돌려보냈다. '잡범'에 가까운 A씨의 사기 혐의 재판은 이렇게 2년 가까이 결론을 내지 못하고 있다.

형사 미제 3분의 1이 '피고인 불출석'

법관들에게 A씨 사례는 낯설지 않다. 30일 권인숙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이 대법원에서 제출받은 장기미제 사건 자료에 따르면, 2020년부터 지난해까지 형사 장기미제 사건(2년 이내 1심 판결이 나오지 않은 사건)의 처리 지연 사유가 '피고인 불출석' 혹은 '형사영구미제'(피고인 도주로 소재를 알 수 없는 경우)로 분류된 비율은 매년 30% 수준(2020년 31%·2021년 32.8%·2022년 27.1%)에 달했다. 재판에 안 나오는 피고인이 형사 재판 지연의 주된 요인 중 하나라는 얘기다.

대법원 예규상 법원행정처는 해당 장기미제 사건 통계를 매년 관리해오고 있지만, 구체적 분석이 이뤄진 적은 없다. 지연 사유로는 '심리미진'이나 '증거조사 지연' 등 주어진 선택지 대신 개별 사유(기타)를 직접 서술하는 판사들이 매년 3분의 1 수준이다. 이를 감안하면 피고인 불출석과 소재 불명은 개별 사유로는 압도적으로 높은 비율이다.

'피고인 증발' 문제는 검찰의 청구 없이 법원이 직권으로 발부하는 구속영장 건수에서도 드러난다. 법원행정처에 따르면 2021년부터 올해까지 기소 후 재판부가 직권으로 피고인에 구속영장을 발부한 건수(실형 선고로 법정구속된 경우 제외)는 매년 2만2,000~2만3,000건에 이른다. 재판부가 검찰이나 경찰에 사라진 피고인의 소재 탐지를 의뢰할 때도 있지만, 큰 성과를 기대하는 분위기는 아니다. 법관들 사이에선 "수사기관이 공소 유지에 큰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볼멘소리까지 나오기도 한다.

재판부 바뀌면 "녹음 틀어라" 전략도 성행

판사들은 이른바 '법 좀 안다'는 피고인들이 형사소송절차를 남용하는 사례도 재판 지연의 큰 원인이라고 지적한다. 인사이동 등으로 재판부가 바뀔 경우 "이전 재판 녹음을 다시 듣자"고 요구하는 전략이 대표적이다. 이 전략은 '사법농단' 재판 피고인이던 양승태 전 대법원장 등이 2021년 2월 법원 정기인사 이후 "공판 갱신 절차를 원칙(녹취 재생)대로 진행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알려졌다. 당시 재판부는 결국 7개월간 법정에서 증인신문 녹취를 들었고, 이 같은 장면은 올해 2월 '대장동 일당' 재판에서도 재현됐다.

방어권 행사를 이유로 녹음 재생을 요구하는 전략은 과거 유력자들의 전유물로 여겨졌다. 하지만 이제는 사건 규모와 상관없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는 게 판사들의 고민이다. 실제 올해 4월 한 현직 판사는 법원 내부 통신망의 질의응답 게시판에 "피고인들이 적당한 방법으로 증거조사를 하는 데 동의하지 않아 전임 재판부의 녹음물을 다시 듣고 있다"며 "다른 법원에서도 많은 시간이 소요되는 걸로 아는데, 녹음물이 아닌 녹취서를 인용할 때 문제가 있는 건지 궁금하다"는 질문글을 올리기도 했다.

상황이 이러다 보니 사법부 최대 현안인 재판지연 문제를 법관 노력에만 맡겨두기엔 한계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수도권 지방법원에서 형사합의부 재판장을 맡고 있는 한 판사는 "법원 집행관들이 직접 피고인 소재를 찾아올 수 있게 하거나, 형사소송법상 공판갱신 절차를 어떤 방식으로 진행할 수 있는지 명확히 규정해주는 등 제도적 보완이 필요하다고 본다"고 말했다.

이정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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