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가 면접관, 합격자 95%가 ‘빽’ 있어…채용비리 흑역사

입력
2023.06.04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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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동료' 면접 선관위 채용비리 파문 확산
2010년 외교부 장관 딸 '특채 파동'부터
2017년 강원랜드 사태, 금융권 비리까지
온갖 비리 횡행하는데 처벌 법조차 없는 현실

노태악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위원장이 지난달 31일 오후 경기도 과천 선관위에서 고위직 간부 자녀 특혜 채용 의혹에 대해 사과하고 있다. 뉴스1

노태악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위원장이 지난달 31일 오후 경기도 과천 선관위에서 고위직 간부 자녀 특혜 채용 의혹에 대해 사과하고 있다. 뉴스1

경남 의령군청에서 8급 공무원으로 일하던 A씨는 2021년 7월 경남선거관리위원회 경력채용에 응시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한둘이 아니었다. A씨는 면접심사표에 자신의 학력과 주소 등 인적 사항을 직접 수기로 작성했고, 4명의 면접관은 짜 맞춘 듯 5개 평가항목에서 모두 똑같은 점수를 줬다. A씨는 4.6대 1의 경쟁률을 뚫고 합격했다. 알고 보니 A씨 아버지는 경남선관위 과장이었고, 면접관 4명 중 2명은 ‘아빠 동료’였다. 입사 1년 4개월 만인 지난 1월 7급으로 승진한 A씨의 승진 심사 결재를 한 총무과장도, 바로 아버지였다.

공정성이 생명인 곳, 선거관리위원회에서 벌어진 일이다. 선관위에서 일어난 ‘아빠 찬스’ 채용비리 의혹은 지금까지 드러난 것만 11건이다. 그 아빠들은 사무처 수장인 사무총장을 비롯해 모두 5급 이상 간부였다.

선관위마저 예외가 아닐 만큼 채용비리는 우리 사회 전반에 넓고 깊게 퍼져 있는 고질적인 병폐다. 청년 실업의 역사보다 더 오래 이어져 온 채용비리 '흑역사'와, 이것이 지긋지긋하게 반복되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인지 짚어 봤다.

외교부 차관 딸 탈락하자 지원자 모두 탈락시켜

너무 흔해서 ‘공공연한 비밀’로 용인돼 왔던 채용비리가 사회적인 공분을 일으키기 시작한 첫 사건은 외교통상부 장관 딸의 5급 사무관 특별채용이다. 2010년 전모가 밝혀진 이 사건은 유명환 전 외교부 장관이 차관이었던 2006년 벌어졌다. 외교부는 1명을 선발하는 특채 공고를 냈는데, 딸 유씨가 외국어 시험 증명서 유효기간 만료로 1차 모집에서 탈락하자 외교부는 다른 지원자까지 모두 탈락시켜버렸다.

2010년 9월 4일자 한국일보 보도. 장관 딸 의혹이 불거지자 외교부는 "장관 딸인지 몰랐다"고 주장한 반면, 유 장관은 "오히려 인사라인에서는 장관 딸이기 때문에 더 엄격하게 한 것으로 보고 받고 있다"며 해명조차 앞뒤가 맞지 않았다.

2010년 9월 4일자 한국일보 보도. 장관 딸 의혹이 불거지자 외교부는 "장관 딸인지 몰랐다"고 주장한 반면, 유 장관은 "오히려 인사라인에서는 장관 딸이기 때문에 더 엄격하게 한 것으로 보고 받고 있다"며 해명조차 앞뒤가 맞지 않았다.

이후 외교부는 2차 모집을 진행, 심사위원 5명 중 2명이었던 외교부 관료 중 한 명이 딸 유씨에게 만점에 가까운 점수를 줬다. 처음부터 오직 한 명만을 위한 채용이었기에 유씨가 합격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아빠 후배’들의 일사불란한 합격 작전이었던 이 ‘특채 파동’으로 유 장관은 사퇴했고, 외교부도 채용방식을 변경하는 등 한동안 여파가 이어졌다.

그러나 그후에도 공공부문과 민간에서는 상상을 초월하는 온갖 채용비리가 이어졌다.

청탁자만 120명인 강원랜드... 공공기관 80%가 채용비리

7년 뒤 역대 최대 규모의 공공기관 채용비리가 터졌다. 2013년 강원랜드 신입사원 최종합격자 518명 중 무려 95%(493명)가 청탁을 통해 입사했다는 사실이 2017년 뒤늦게 밝혀진 것이다(내부감사 결과). ‘희대의 채용비리 사건’이라 할 법한 이 사건은 청탁자만 120명에 달했다. 청탁자 명단에는 국회의원을 비롯해 강원랜드 사장, 중앙부처·지자체 공무원, 언론인, 학교 교감, 스님까지 포함돼 있었다. 크고 작은 권력을 가진 사람들에겐 청탁이 일상처럼 스며 있었다는 얘기다.

강원 정선군의 강원랜드 본사 사옥. 강원랜드는 '폐광 지역 개발 지원에 관한 특별법'을 근거로 폐광지역 경제 회생을 위해 설립된 공기업이다. 강원랜드제공

강원 정선군의 강원랜드 본사 사옥. 강원랜드는 '폐광 지역 개발 지원에 관한 특별법'을 근거로 폐광지역 경제 회생을 위해 설립된 공기업이다. 강원랜드제공

강원랜드에는 채용브로커까지 가담했던 것으로 드러났고 부정청탁을 감시해야 할 강원랜드 감사위원장마저 연루돼 있었던, 그야말로 복마전이었다. 파문이 커지자 정부는 2017년 10~12월 공공기관 채용비리 특별점검을 벌였고 전국 공공기관·단체 1,190곳 중 80%(946곳)에서 4,788건의 채용비리가 적발됐다. 정부는 이 중 109건을 수사의뢰하고, 255건은 징계했다.

2017년 정부가 벌인 '공공기관 채용비리 특별점검' 결과. 정부 자료 캡처

2017년 정부가 벌인 '공공기관 채용비리 특별점검' 결과. 정부 자료 캡처

이후 정부는 정부합동기구인 ‘공공부문 채용비리 근절 추진단’을 만들어 매년 전체 공공기관의 채용절차를 점검해 왔다. 적발 건수가 점점 줄어들긴 했으나 지난해에도 수사의뢰나 징계가 필요한 중대 채용비리가 47건이나 적발됐다. 경미한 채용절차 위반 등 업무 부주의도 1,503건에 달했다.

‘꿈의 직장’이라고 불리는 곳, 국민 세금으로 운영되는 곳에서 일어났다는 점에서 국민들의 분노와 박탈감은 더욱 클 수밖에 없었다.

'VIP 리스트'는 합격, 여성은 탈락... 금융권의 민낯

민간부문 중 채용비리로 악명 높은 곳은 단연 금융권이다. 시작은 2017년 우리은행이었다. 국정감사에서 제기된 의혹을 조사해 보니 우리은행이 국가정보원이나 금융감독원, 은행 주요 고객, 전·현직 인사의 자녀나 친인척을 특혜 채용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에 금융감독원은 11개 국내 은행을 대상으로 현장검사를 벌였고, 대부분의 은행이 비슷한 형태의 비리를 저지르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인사청탁을 받고 2015년부터 3년 동안 고위공직자나 주요 고객의 자녀·친인척 등 불합격권에 있던 지원자 30여 명을 합격시킨 혐의(업무방해죄)로 2019년 1월 서울북부지법에서 열린 선고공판에 출석한 이광구 전 우리은행장. 그는 1심에서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고 법정 구속됐 다. 연합뉴스

인사청탁을 받고 2015년부터 3년 동안 고위공직자나 주요 고객의 자녀·친인척 등 불합격권에 있던 지원자 30여 명을 합격시킨 혐의(업무방해죄)로 2019년 1월 서울북부지법에서 열린 선고공판에 출석한 이광구 전 우리은행장. 그는 1심에서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고 법정 구속됐 다. 연합뉴스

하나은행은 2013~16년 신입사원 채용 과정에서 ‘VIP 리스트’를 작성해 관리하며 은행 고위 임원과 관련됐거나 특정 학교 출신 지원자에게 특혜를 준 것으로 나타났다. 또 여성 지원자의 합격 비율을 미리 정해 두고 남성 위주로 채용하기도 했다.

KB국민은행은 2015, 2016년 신입 행원을 채용하면서 남녀 비율을 6:4, 7:3으로 하라고 내부적으로 정한 뒤 고의로 남성 지원자의 점수를 올렸다. 광주은행은 2015년 지역대학의 추천을 받아 진행한 정규직 행원 채용에서 이 은행 업무지원본부장의 딸에게 서류에서부터 만점을 줬다. 또 2차 면접에는 아버지가 직접 면접관으로 들어가 최고 점수를 줬다. 대담한 아버지의 딸은 최종합격했다.

그런데 이런 은행들의 비리를 조사한 금감원 역시 2014~16년 변호사 및 신입사원 채용에서 청탁받은 응시자의 점수를 상향조정하거나 채용 예정 인원을 부당하게 늘려 합격시킨 것으로 감사원 감사에서 적발됐다. 조사받는 곳도 조사했던 곳도 사실은 모두 공범이었다.

2017년 9월 21일 금융감독원의 신입사원 채용비리를 다룬 한국일보 보도.

2017년 9월 21일 금융감독원의 신입사원 채용비리를 다룬 한국일보 보도.


가해자 처벌, 피해자 구제할 법 없어...국회가 법 만들지 않는 이유

10년 넘게 이어진 채용비리 사건으로 이해충돌방지법, 공무원행동강령 등의 채용 관련 규정은 계속 강화돼 왔다. 그럼에도 채용비리가 근절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상황이 이처럼 심각한데도 가해자는 마땅한 처벌을, 피해자는 구제를 받게 하는 채용비리 관련 법이 없다는 점이 중요한 이유 중 하나로 꼽힌다.

채용비리에 연루된 가해자들에겐 대부분 업무방해죄가 적용된다. 채용비리라는 범죄를 처벌할 다른 법이 없기 때문이다. 딸을 직접 면접심사했던 광주은행 본부장은 대법원에서 징역 10개월, 집행유예 2년을 최종 선고받았는데, 그에게 적용된 혐의 역시 업무방해였다. 이처럼 업무방해죄가 적용되면 가해자는 중대범죄를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약한 처벌만 받게된다. 또 업무방해죄에선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응시생들이 피해자로 인정받지 못하기때문에 구제받을 길도 없다.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이런 법 공백을 메우기 위한 법은 이미 국회에 발의돼 있다. 류호정 정의당 의원은 2021년 1월 ‘1호 청년법안’으로 ‘채용비리 처벌에 관한 특별법’을 발의했다. 윤준병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지난해 4월 채용비리 형사처벌, 부정합격자 채용 취소, 피해자 구제 등의 내용을 담은 ‘채용절차의 공정화 및 채용비리 방지에 관한 법률’을 발의했다.

하지만 이 법안들은 논의되지 않고 있다. 이에 대해 류호정 의원은 이렇게 말했다.

“(채용을) 청탁한 사람부터 해서 피해 본 사람까지 구제하는 법안이 이미 국회에 올라와 있는데 계속해서 논의가 되지 않고 있고요. 도대체 왜 이 법안이 통과가 안 될까를 생각해 보니까 국회의원도 (청탁하는) 갑 내지 (그걸 사주받은) 을에 해당하는 거예요. 이해관계가 있는거죠.

그리고 (국회의원들은) 청년들의 입장에서 좀 멀어진 분들이어서이지 않을까요. 이게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인지, 상실감을 불러일으키는지에 대해서 공감이 잘 되지 않아서 우선순위에 올라오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5월 31일 SBS 라디오 ‘김태현의 뉴스쇼’)

2021년 7월 국회에서 열린 청년정의당 채용비리신고센터 '킬비리' 설립 기자회견에서 강민진 청년정의당 대표(우측부터)와 센터장을 맡은 류호정 의원, 여영국 정의당 대표가 채용비리 척결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국회사진기자단

2021년 7월 국회에서 열린 청년정의당 채용비리신고센터 '킬비리' 설립 기자회견에서 강민진 청년정의당 대표(우측부터)와 센터장을 맡은 류호정 의원, 여영국 정의당 대표가 채용비리 척결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국회사진기자단


남보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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