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묵묵히 일터로 향하는 당신께

입력
2023.05.29 21:00
25면

고우리 지음, '편집자의 사생활'

편집자주

'문송하다'는 말도 있지만, 그래도 마음을 풍요롭게 하는 건 인문학적 교양입니다. '문송'의 세계에서 인문학의 보루로 남은 동네책방 주인들이 독자들에게 한 권의 책을 소개합니다.

"오늘 정말 큰 거 배워 가네." 어느 도서관에서 진행하고 있는 글쓰기 수업이 끝날 무렵, 한 학우분의 혼잣말이 내 귓속으로 쏙 들어왔다. 오늘 수업 내용이 정말 유용했나 보다, 나 자신 잘했다 하고 뿌듯해하려던 찰나, 그분이 나를 보며 한마디를 덧붙였다. "책을 만드는 편집자라는 직업이 있다니, 처음 알았다니까요!"

그날 내가 수업에서 언급한 '출판 편집자'라는 직업에 대한 이야기였다. 편집자는 책 만드는 전반적인 과정을 다스리는 사람이다. 흔히 혼자서 교정교열만 보는 직업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편집자의 일은 기획, 작가와의 의사소통, 윤문, 마케팅용 카피 및 보도자료 작성, 독자 응대 등 다방면을 아우른다. 디자이너, 번역가, 에이전시, 제작처 사이에서 의견을 조율하는 일종의 프로듀서(PD)라고 할까.

편집자는 내가 사회생활을 시작한 직업이었고, 직업인으로서 감당해야 했던 첫 고뇌는 나의 일이 그림자 속에 감추어져 있다는 사실이었다. 애초에 출판 편집자라는 직업이 있는 줄 모르는 사람도 많았고, 어떤 책이 잘 팔리면 작가의 공로와 명예만이 빛났다. 책이 탄생하기까지 밤낮없이 원고를 매만졌던 편집자의 노고는 좀처럼 티가 나지 않았다. 그는 뒤에서 조용히 자신의 작가와 책을 열렬히 지지하고 사랑할 뿐.

그러나 한 명의 작가 뒤에는 분명 편집자를 비롯하여 좋은 책 한 권을 만들어내기 위해 분투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출판은 손에 쥐어 만질 수 있는, 오래 보관하며 볼 수 있는 물건을 만드는 일이기 때문에 책 뒤에 선 그들은 늘 예리한 시선으로 분주하게 작업하고 있다.

'편집자의 사생활'은 여섯 곳의 출판사에서 편집자로 일하다 독립해 1인 출판사 '마름모'를 차린 고우리 대표가 쓴 책이다. 작가들 뒤에 감추어진 편집자의 일상이 어떻게 굴러가는지를 위트 있고 진솔하게 그려낸다. 16년 차 편집자이자 1년 차 대표로서 좌충우돌하는 그의 모습은 독자를 자꾸 눈물과 웃음의 경계에 세우고 마음을 간지럽힌다.

창업과 운영에 얽힌 출판계 뒷이야기는 물론, 여러 회사를 거치며 겪은 이직과 퇴사 문제, 사람 관계, 연봉 협상, 노조 활동 등 회사 생활에 대한 일화까지 폭넓게 펼치는 이 책은 결국 살아남기를 향해간다. 행복하게 잘 살아남기. 그것은 우리 모두의 일과 고민, 희로애락에 맞닿아 있다. 그의 글은 먼저 길을 걸어간 자의 경험담으로 우리에게 작용한다. 작가 고우리는 편집자 혹은 대표이기 이전에 '실수해도 괜찮으니 그저 시도해보라'고 거듭 말해주는 선배인 셈이다. 그의 한계가 역설적이게도 뒤따라오는 이들에게 용기를 심는다.

"내가 살아남을 수 있을까? 먹고살 수 있을까? 이 치열한 판에서? 그런데 지금은 그런 생각을 안 한다. 그런 생각이 들지 않는다. 나는 살아남을 것이다. 나의 작가들은 이름을 남길 것이다."(고우리, '편집자의 사생활', 미디어샘)

그래서 이 책은 가장 빛나는 곳은 아니더라도 자기 자리에서 묵묵히 책임을 다하는 이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출판의 세계에서 번역가, 디자이너, 에이전트, 인쇄소와 후가공 업체의 기술자들, 온라인 서점 MD, 동네 서점 책방지기들, 물류 창고와 배송 노동자가 관여하듯, 세상에는 눈에 띄지 않는 직업인이 넘쳐나고, 우리의 세상은 대개 그들의 노력을 통해 움직인다.

주변을 둘러보면, 너무나 많은 당신들이 매일 잘 살아남기 위해 애쓰는 모습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자신의 자리에서 역할을 해내는 당신, 내 하루를 안온하게 만들어주는 당신. 이 책을 덮으며 나는 다른 누구 아닌 당신의 얼굴을 본다.

취미는 독서

  • 김민채 책방지기

취미는 독서는 전남 순천시 옥천동에 있는 작은 서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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