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에게 더 큰 죄 지을까 죽지도 못해"...강릉 급발진 의심 사고 할머니의 절규

입력
2023.05.24 09:33
수정
2023.05.24 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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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2월 강릉 홍제동 발생 사고
열두 살 손자 숨지고 할머니 크게 다쳐
급발진 제조사 책임 인정 단 한건도 없어
"운전자 원인 규명 책임, 모순이며 폭력"

지난해 12월 강릉 홍제동에서 발생한 급발진 의심 사고 장면. 유튜브 한문철 TV 캡처

지난해 12월 강릉 홍제동에서 발생한 급발진 의심 사고 장면. 유튜브 한문철 TV 캡처

"차 결함으로 열두 살 손자 이도현을 하나님 품으로 보낸 할머니입니다. 죽자니 아들에게 더 큰 죄를 짓는 것 같고 도현이의 억울함을 풀어주십사 이렇게 탄원서를 올립니다."

지난해 12월 6일 강릉 홍제동에서 발생한 급발진 의심 사고로 손자를 잃은 할머니가 재판부에 낸 탄원서의 일부다.

춘천지법 강릉지원 민사2부(부장 박재형)는 23일 도현군의 가족이 자동차 제조사를 상대로 낸 7억6,000만 원 규모의 손해배상 청구 재판 첫 변론기일을 열었다. 학원 수업을 마친 손자를 집으로 데려다주다 난 이 사고로 도현군은 숨지고 할머니 최모(68)씨는 크게 다쳤다. 차량 블랙박스에는 차량의 속도가 갑자기 빨라지다 공중으로 치솟은 후 배수로로 추락하는 영상과 굉음, 최씨가 도현군의 이름을 애타게 부르는 음성이 녹화됐다.

최씨는 이날 재판에서 "손자가 살았어야 했는데, 나만 살아남아 너무 미안하고 가슴이 미어진다. 저는 죄인"이라며 오열했다. 이 소송을 낸 이유에 대해선 "누가 일부러 사고를 내 손자를 잃겠느냐, 진실을 밝혀달라"고 했다.

지난해 12월 강릉에서 발생한 차량 급발진 의심 사고의 책임 소재를 둘러싼 민사소송의 첫 재판이 23일 오후 춘천지법 강릉지원에서 열렸다. 사진은 전국에서 모인 탄원서 1만7,000여 부 모습. 연합뉴스

지난해 12월 강릉에서 발생한 차량 급발진 의심 사고의 책임 소재를 둘러싼 민사소송의 첫 재판이 23일 오후 춘천지법 강릉지원에서 열렸다. 사진은 전국에서 모인 탄원서 1만7,000여 부 모습. 연합뉴스

아버지인 이상훈씨는 호소문을 통해 "급발진 사고의 원인을 전적으로 운전자에게 입증케 하는 자체가 모순된 행위이며 폭력"이라며 "언제까지 제조사의 이권과 횡포 앞에 국민들의 소중한 생명의 가치가 도외시돼야 하는가"라고 호소했다.

이어 "대한민국에서 급발진 사고는 가정파괴범이자 연쇄살인범이다. 부디 이번 사고의 원인을 철저히 규명해 주시고 대한민국은 옳은 것이 강한 것을 이기는 사회라는 것을 국민들에게 알려주시기를 부탁드린다"고 말했다. 한 언론 인터뷰에 따르면 최씨는 사고 이후 불과 5분 거리인 아들 부부와 거의 왕래하지 못했고, 찾아온 아들 부부 앞에서 무릎을 꿇고 사죄하기도 했다고 한다.

원고 측 변호인은 이 사고가 차량 급발진의 전형적인 요소를 갖고 있다고 주장했다. "'웽' 하는 굉음과 머플러(소음기)에서 흘러나오는 액체, 도로상 타이어 자국과 흰 연기가 있고 블랙박스 영상에는 차량의 오작동 결함이 있음을 나타내는 운전자의 생생한 음성들이 녹음되어 있다"는 설명이다. 재판부는 원고 측이 법원에 신청한 속도 감정(사고기록장치)과 음향 감정 등 2건의 감정을 모두 받아들였다. 안타까운 사연에 전국에서 보내온 1만7,000여 장의 탄원서도 함께 제출됐다.

제조사 측은 차량 결함이 아니라는 취지의 의견서를 재판부에 제출하며 "사건 대리를 맡은 지 얼마 되지 않았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국과수)의 사고 원인 조사 결과를 충분히 확인 후 상세한 반박을 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13년간 국내에서 급발진 의심 사고 760여 건이 발생했지만, 지금까지 국내에서 차량 급발진 사고로 인정되거나 제조사의 책임이 인정된 사례는 단 1건도 없다.

최씨는 이 사고 가해자로 교통사고처리 특례법상 치사혐의로 입건된 상태다. 경찰은 최근 유가족 요구로 국과수에 일부 재조사를 의뢰했고, 조사 결과가 나오면 검찰 송치 여부를 결정한다는 계획이다. 재판부는 6월 27일을 다음 변론기일로 지정하고 전문 감정인을 선정해 감정에 필요한 부분을 특정하기로 했다.

원다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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